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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하다가 춤을?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글 쓰려고 메모했어요"라는 어르신들... 흥보다 경외심에 나온 '몸치' 글쓰기 강사의 춤

등록 2025.08.05 17:26수정 2025.08.0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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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시간에 있던 일을 글로 남깁니다.[기자말]
방학을 지나고 복지관 글쓰기 수업의 문이 다시 열렸다. 오랜만의 수업이라 결석생이 많으면 어쩌나 했는데 교실이 꽉 찼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반 이상이 글까지 써오셨다. 어르신의 글로 메시지 창과 메일이 연달아 울린다. 이보다 반가운 알림이 또 없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 분은 선교사를 따라 터키에 간 이야기를 꺼내셨다.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자세한 비행 시간까지 있는 꼼꼼한 글이었다. 또 다른 분은 백내장 수술을 받은 날을 회상하며 수술대 위에서 느껴진 눈꺼풀의 무게와 의료진의 숨결을 그대로 옮기셨다. 병원의 차가운 공기, 코끝을 스치는 알코올 냄새, '눈을 꿰매겠다'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말까지 그대로 옮기셔서 나도 모르게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제르바이잔 여행기를 써오신 분도 있었다. 혼자 떠난 첫 여행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라는 큰 주제로 기록하셨다. 여행에 별 관심 없는 내가 이름도 어려운 '아제르바이잔'을 검색할만큼 생생했다. 나는 모두에게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써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 쓰려고 메모를 계속 했어요. 지나가는 일도 그냥 안 넘기고 적어놨어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저도 그랬어요"라는 말이 들린다. 수업 초반과 너무 다른 분위기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수업 초반에 "쓸 얘기가 없어요. 너무 평범해요"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는 평범과 특별 그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다고, 그러니 쓰면 쓸수록 쓸 일이 생긴다'"라고 늘 말했지만 그게 어르신들에게도 통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수업으로 확신이 생겼다. 쓸수록 쓸 일이 생기는 건 나이에 상관없이 다 통하는 법칙이다.

통하기 시작한 수업, 돌발행동이 나왔다


개강 첫날, 복지관 글쓰기 수업 개강 첫날인데 결석생이 없어서 감사했다
▲개강 첫날, 복지관 글쓰기 수업 개강 첫날인데 결석생이 없어서 감사했다 최은영

쓰기 위해 메모를 한다는 건 삶을 유심히 바라보고, 평범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붙잡는 일이기도 했고, 오늘을 더 자세히 바라보는 연습이기도 하다. 그게 어르신 수업에도 통했다는 게 신이 난 나는 나도 모르게 어설픈 춤을 췄다.

몸치의 춤사위에 어르신들은 당황한 표정이다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내 돌발행동에 나도 놀랐지만 그 웃음소리가 신난 나는 '에라 모르겠다' 마음으로 더 과감하게 둠칫했다. 덕분에 웃음 소리도 커졌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손등의 주름 사이를 파고드는 기억들은 한치의 흐림도 없이 종이 위를 걸었다. 한 문장, 한 단어마다 삶의 결이 느껴졌고, 그것은 아무리 세련된 글이라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진실이었다. 어르신들의 메모는 낡은 기억을 꺼내는 손잡이였고, 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삶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이번 학기에 새로 오신 한 분은 "수업 자체가 예쁜 수필 같아요"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다. 또 춤을 출 뻔했다.

집에 오는 길, 내 어설픈 춤을 다시 정의해봤다. 그것은 흥 때문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써 내려간 삶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생생함 앞에서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된다. 글쓰기 수업은 앞으로도 그저 글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더 자세히 '함께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다음 수업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복지관글쓰기 #시니어글쓰기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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