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가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30분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위
노동자의 중대재해 사망 소식이 언론 등을 통해 빠르게 전파된다. 곧이어 해당 현장의 중대재해 발생 원인을 둘러싼 다양한 분석이 줄을 잇는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다음과 같은 보도가 따라붙는다.
"기존 위험성평가에서 발견된 문제는 없었다."
이쯤되니 현장에서는 '위험성평가'가 '빛 좋은 개살구'로 취급된다. 누군가는 위험성평가가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있어도 한국에서는 애초부터 적용이 불가능한 제도라고 문제 제기 한다. 특히 노조 조직률이 13% 수준에 그치는 현실 때문에, 노조가 없는 다수의 사업장에선 오히려 현장의 구체적인 위험을 은폐하는 데 형식적인 위험성평가가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위험성평가 무용론'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문제제기는 결코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벌써 한 해를 훌쩍 넘긴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에서도 형식적 위험성평가의 한계가 확인된 바 있다. 최근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고 김충현 노동자의 사망에서도 위험성평가가 서류상 작업으로 대체되어 예방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 또한 확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위험성평가는 2010~2012년 시범사업을 거쳐, 2013년 대한민국의 모든 일터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자라면,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할 사업주의 의무로 법제화됐다
[1]. 노동안전보건 영역에서 선진국으로 평가되는 영국의 경험이 유럽과 다른 국가들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산재사망의 감축에 있어 '위험성평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한국에서는 이를 먼저 접한 행정 관료와 전문가들을 통해 소개되었고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도입(하향식 도입)'이 지닌 한계는 명확했다. 위험성평가가 가진 철학, 위험성평가가 자리잡기까지 영국에서의 지난했던 사회적 논의와 숙고 과정 등은 생략된 채 '위험성평가'라는 형식만 차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렇게 도입된 '위험성평가'는 사업주에게도, 노동자들에게도 위험성평가 실시의 이점을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했고,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형식적인 실시율을 높이는 것에만 열중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과 시행을 통해 사업장 자기규율예방체계 구축의 핵심으로 '위험성평가'가 다시금 강조되며, 위험성평가가 현장에서 제대로 정착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 대상이 된 사업주들이 거대로펌의 컨설팅과 지원하에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류상 위험성평가를 실시하고 있는 부작용이 여전히 다수의 일터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이나마 노사 공동의 논의와 실행 과정을 통해 일터의 위험을 발굴해내며, 현장 개선의 계기로 위험성평가를 정착시켜 나가는 경험과 사례 또한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형식적 위험성평가를 넘어서는 길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영국에서 시작된 위험성평가는 기존과는 다른 위험관리 철학을 담고 있다. 이는 '일터에서 위험관리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 위험관리가 단순히 안전관리자나 보건관리자처럼 기업의 특정부서 담당자의 주요 업무에 그쳐서도 안 되며, 사고 발생 이후 이를 관리·감독하는 정부 차원의 사후적 관리에만 의존해서도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예방을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실제 위험에 노출되어 일하는 노동자가 직접 위험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노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작업장 위험관리를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러한 위험성평가가 내포하고 있는 '자기규율'의 철학으로 인해, 한국의 법과 제도 또한 위험성평가 실시 과정에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노동자 참여'가 법·제도에 반영되기까지는 노동계의 지난한 투쟁이 동반됐지만 말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제36조 및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에서는 "사업주는 위험성평가를 실시할 때 해당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반드시 참여시켜야 하며", "참여 대상에는 이주노동자, 수급업체(파견·도급) 노동자, 일용 노동자 등 현장에서 실제 위험에 노출되는 모든 노동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관리감독자가 대신 참여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현장에서 위험을 가장 잘 아는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더라도, 현장에서 위험관리의 공동주체로서 노동자들이 위험성평가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지 여부는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결국 이 또한 해당 사업장 노사의 힘 관계가 철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최근 사업장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위험관리의 공동파트너로서 이해하기는커녕, 안전을 앞세워 노동자에 대한 일상 통제를 강화하는 등 본래의 취지를 역행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위험성평가가 현실화 된 고 김충현의 위험

▲ 고 김충현 노동자가 재해 당일 작성한 TBM(작업 전 안전일지) 문서. 작업 전 TBM 회의도, 실제 작업도 그는 항상 '홀로' 수행했다.
김충현 대책위
최근 발표된 '태안화력 고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의 1차 사고조사 보고서에는 형식적 위험성평가가 오히려 노동자의 위험을 방치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태안화력발전소의 2차 하청업체(한국파워 O&M) 소속이었던 고 김충현 노동자는 1차 하청업체인 한전KPS의 요청으로 작업에 필요한 부품, 툴 등을 제작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기계 공작실에서 홀로 근무했던 재해자에게는 계약에 포함되지 않은 작업을 원청인 KPS가 공식·비공식적으로 의뢰하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작업절차서에 따르면, 재해자의 작업은 다음의 절차로 진행되어야 한다. 원청인 KPS가 작업의뢰서를 발행하면, 하청업체의 현장대리인 혹은 관리자가 작업허가서를 발행하고, 이에 따라 작업을 수행하는 절차로 말이다. 이에 따라 세부 작업에 대한 위험성 평가와 구체적인 작업 내용, 방식 등이 작업 전에 작업자와 공유되어야 하고, 작업 전 TBM(TOOL BOX MEETING)을 통해 작업지시자와 작업자 사이에 소통을 다시 한번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인의 작업지시는 앞선 절차들이 생략된 채 구두통보를 통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업수행 전 반드시 실시했어야 할 안전절차 또한 생략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책위 보고서에 따르면, 재해자의 업무에 대한 위험성평가 기록인 TBM문서
[2]는 그가 위험에 홀로 노출되어 있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TBM 회의도 혼자, 서류작성도 혼자, 유해위험 파악도 혼자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적 TBM문서로는 일상적인 위험성평가를 갈음할 만한 작업상의 조치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공정에 대한 유해·위험 평가뿐 아니라 위험관리 방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로, 위험한 상황에 홀로 방치되었던 한 노동자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아픈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처절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험성평가가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자기규율예방체계, 위험성평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등 이름을 달리해 최근 강조되는 사업장 안전보건활동은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유해·위험을 파악하고, 위험을 감소시켜 나가는 과정은 결코 한 번의 과정으로 완결될 수 없고, 노사의 두터운 신뢰 하에 장·단기 대책의 수립과 개선활동으로 순환해야 한다.
따라서 위험성평가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자가 위험관리의 공동주체이자 파트너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그 전제이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또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노사 현장 합동점검,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 작업환경측정, 특수건강검진 등 사업장 차원에서 진행해야 할 일상적인 안전보건활동이 제대로 자리잡아야 위험성평가도 뿌리내릴 수 있다. 현장의 전문가인 노동자가 위험에 대해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말하고 참여할 수 있는 많은 경로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질적인 위험성평가를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다.
각주
[1] 위험성평가는 상시근로자 1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이 기본적으로 위험성평가 의무 대상이다. 다만, 상시근로자 5인 미만, 건설공사 1억 원 미만 현장 등 일부 영세·소규모 사업장에는 절차 생략 등 예외적 완화가 적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사업장이 위험성평가 대상임은 분명하다.
[2] 지난 윤석열 정부는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을 개정하여 위험성평가 기준을 완화하고, TBM(Tool Box Meeting,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과 같은 일상적인 안전 활동을 상시 위험성평가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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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들여왔는데... 한국에선 왜 '죽음의 기록'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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