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 보증금 계약서 계절노동자가 계약 만료를 못할 경우 보증인 2인에게 50만 페소(한화 1200만원) 부과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부채속박 행위로 인신매매에 해당한다.
고기복
이미 6만 페소를 지출한 크림슨은 어쩔 수 없이 두 문건에 서명했고, 2023년 4월, 한국으로 출국했다. 크림슨은 한국 입국 다음날부터 비닐하우스 안에서 수박 접붙이기 작업을 했다. 접붙이기가 손에 익을 무렵, 고추 등의 다른 작물들로 작업이 이어졌다. 쉴 틈 없이 하루 11시간씩 일했지만, 잔업 수당은 없었다. 계절노동자들이 너무 늦게 한국에 들어왔다며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던 농장주는 일을 재촉하긴 해도 거칠지는 않았다.
7월 중순, 크림슨은 일요일에 농장주의 지시로 이웃 농장의 옥수수 수확 작업에 투입되었다. 새참을 먹기 위해 트럭 짐칸에 탔을 때 사고가 났다. 언덕에 주차한 차가 구르기 시작했고, 크림슨은 짐칸에서 떨어져 어깨뼈가 부러졌다.
부상당한 크림슨은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꼈지만, 농장주는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 농장주에게 숨을 못 쉬겠다고 하자, 그제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응급처치가 끝나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브로커가 영상으로 사고 진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시했다. 언덕에 트럭을 주차한 사람이 동료 필리핀인이었는데, 그 사실이 들통 나면 그가 처벌받을 수 있으니, '차에서 졸다가 떨어졌다'라고 진술하라고 했다. 크림슨은 그게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크림슨은 사고 보상 처리를 위해 파에테시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당신 실수로 난 사고인데, 무슨 보상이냐? 일하다 난 사고도 아니고, 계약 만료도 하지 않았으면서..."
크림슨은 파에테시에 필리핀 해외이주노동자들이 해외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즉각적인 치료 및 도움을 목적으로 한 기금(AKSYON) 수혜자로 신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기금 수혜자로 신정되면 5만 페소를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크림슨은 동료들의 증언을 받아 기금 신청을 다시 요구했지만, 페에테시는 브로커의 말만 믿었다.
A업체가 불법업체라는 사실을 필리핀 이주노동부 장관이 밝힌 이유
필리핀 파에테, 시닐로안, 팡일 등에서 계절노동자 송출 업무를 불법적으로 하다 적발된 A업체는, 자신들이 필리핀 이주노동부(DMW)에 등록된 에이전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필리핀 한스(Hans Cacdac) 이주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기자회견에서 A업체가 이주노동부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불법업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불법 채용이다. 우리는 브로커 시스템을 근절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한다.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하거나, 브로커가 이주노동자에게 대출이나 담보를 요구하는 행위 등에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다."
한스 장관은 이주노동부가 계절노동자제도와 관련하여 최소 48건의 형사 사건을 제기했다고 언급했다. 또 형사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일부는 지자체 직원과 한국인이라고 밝히며, '과도한 송출 수수료와 불법적인 계약 강요, 지정 송금 요구와 공제, 강제노동과 인신매매 위험에 노출된 부분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이주노동부는 지난해 11월 브로커 등을 통해 계절노동자들을 불법 모집한 7개 지자체에 대해 파견을 중단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당시 이주노동부는 해당 지자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양구군에 계절노동자들을 송출해 왔던 지자체들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임금체불 집단 진정, 왜 발생했나

▲양구 계절노동자들 양구에 배정된 계절노동자들이 휴일을 맞아 마트 앞에서 모였다.
고기복
2025년 7월 30일, 계절노동자 91명을 대리하여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체불임금에 대한 집단 진정을 제기했다. 필리핀 파에테, 팡일 출신인 이들은 2023년(총 476명)과 2024년(총 541명) 강원도 양구에서 계절노동자로 일한 바 있다. 이들은 A업체에 기본 수수료 144만 원과 5개월 근무 후 기간 연장 시 매월 24만 원, 매해 각각 216만 원을 갈취당했다.
A업체는 2023년 계절노동자들의 급여를 필리핀으로 송금한 후 필리핀에서 월 약정 금액을 공제하다 실패하자, 고용주들에게 2023년 미수금과 2024년 수수료 전액을 급여에서 공제해 직접 송금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고용주들은 계절노동자들로부터 동의를 받지 않은 채 A업체가 요구한 금액을 급여에서 공제하여 A업체 대표 명의의 계좌로 송금했다. 두 해에 걸쳐 양구군 계절노동자 1천여 명에게 A업체가 갈취한 금액은 지급을 거부한 이들을 감안해도 최소 12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근로기준법 임금 직접 지급 원칙 위반이다.
2년에 걸쳐 피해를 봤던 계절노동자들이 집단 진정을 내게 된 직접 원인은 필리핀 이주노동부의 송출 중단 행정명령이었다. 부당한 피해를 당하면서도 재입국 추천을 희망한 이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입국 불가라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그동안 피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그들에게 피해당하던 당시에는 왜 아무 소리 안 한 것이냐고 묻는다. 이는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말 안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양구에서 일했던 계절노동자들은 근로계약과 다른 마을회관에 살면서도 숙식비를 공제당했고, 고용주에게 물리적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일하면서도 입을 닫고 있던 사람도 있고, 불만을 제기했다가 조기 귀국 조치되었던 이도 있다. 재입국이 좌절된 계절노동자들은 A업체의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하나둘 연명을 하기 시작했고, 집단진정에 이르게 되었다.
계절노동자들은 양구에서 K-드림을 꿈꾸었지만 결과는 임금착취였다. 계절노동자제도 아래서 지금도 다른 '크림슨'들이 고된 하루를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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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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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계절노동자 91명 집단 임금체불 진정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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