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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 마을지 제작의 숨겨진 갈등

모두가 기록자가 될 수 있는 시대... 마을 역사와 문화 기록의 방법론과 과제

등록 2025.08.13 10:49수정 2025.08.1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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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책을 우리는 흔히 마을지 또는 향토지라고 부른다. 도서관 향토자료실에 가면 볼 수 있지만, 두껍고 다소 고리타분한 표지 탓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한때는 영원히 펼쳐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책이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애타게 찾는 자료가 되었다.

예전에 살던 마을을 방문했다가 문득 "향토지를 한번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모든 마을에 당연히 향토지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본 후, 향토지가 있는 마을보다 없는 마을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왜 지금, 마을지를 쓰는가

풀뿌리 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마을지를 제작하는 움직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 마을이 언제, 왜 생겼는지, 숨겨진 자랑거리나 인물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주민들은 마을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자부심과 정체성을 회복하려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부 마을의 특별한 시도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흐름이다.

하지만 마을지 제작 과정은 마을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마을은 출향 인사를 포함한 수십 명이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성대한 출범식과 함께 집필에 나선다. 마을 곳곳에 현수막이 걸리고, 대대적인 홍보로 주민 전체의 참여를 유도한다.

반면 몇몇 마을은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조용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칭 마을의 역사를 꿰고 있다는 유지가 전담하거나, 아예 외부 전문가에게 위탁하기도 한다. 이 차이는 마을의 현실과 필요에 따른 선택이며, 정해진 원칙은 없다. 중요한 건 마을을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기록하는 것이 정확할지, 아니면 마을을 모르는 외부인이 객관적으로 조사해서 쓰는 것이 더 정확한가에 대한 판단이다.


누가 써야 하는가

"우리 마을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남의 마을 역사를 쓰려고 하세요?"


마을 주민과 인터뷰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반응이다. 누군가는 '나만 알고 있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부인의 갑작스러운 접근이 불쾌할 수도 있고, 마을 자체에 대한 불만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외부인은 면담과 조사만으로 마을에 대한 역사를 쓰는 데 한계가 있다. 주제 선정이 빗나가거나, 다른 마을의 향토지 제작 경험을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실수도 한다.

그러나 외부인은 마을의 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냉정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마을의 숨겨진 특징을 못 찾아 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다른 마을 향토지를 만든 경험으로 이를 보편화해서 사용하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인으로서 마을하고는 비교적 자유롭기에 냉정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사실을 찾아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기록보다 어려운 건 '합의'

어떤 마을은 어렵게 원고를 다 만들고도 출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관계나 서술 방식에서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라고 하더라"는 주장만 오갈 뿐,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없는 경우다.

이때는 진실 게임이 벌어진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경우도 있고, 수년째 편집 작업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는 마을도 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묵은 감정이 얽혀 있는 경우, 체면 문제로 기록을 꺼리기도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며 끝내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아는 게 병'이 될 때도 있다

내부 집필자는 마을과 조상의 삶을 잘 아는 장점이 있지만, '아는 것이 병'이 될 때도 있다. 알고 있는 정보를 검증 없이 서술하거나, 객관성을 잃고 자기 해석을 넣기도 한다. 본인은 아무리 공정하게 썼다고 주장해도, 다른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최종 원고에 대한 검수는 마을의 몫이다.

원고에 대한 학문적·이론적 검수라면 전문가가 맡으면 된다. 하지만 향토지는 사실관계 위주의 기록이기에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기억이 중요하다. 문제는 그 시기를 직접 겪은 사람은 대부분 없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희미한 기억, 추측, 추론뿐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면서 기록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왜곡의 위험도 크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기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초'라는 공식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달라질 수 있어도, 사실관계를 왜곡할 수는 없다. 사관이라는 전문가가 기록을 맡았기에 공정성도 보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누구나 쉽게 기록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이 갖춰졌다. 굳이 문자로 어렵게 정리하지 않아도, 영상과 녹음만으로도 충분히 기록이 가능하다.

오늘 집으로 가는 길,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로 마을을 기록해보자. 셔터를 누르는 횟수만큼 마을은 기록된다. 오늘 내가 한 잠깐의 노력이, 훗날 우리 마을을 기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제 마을은, 우리가 직접 기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마을지 #향토지 #마을 #마을기록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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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미디어인 마을 방송을 운영하면서 지역 일간지의 도민기자를 하고 있는 제주 토박이 수필가입니다. 제주의 문제와 지역 현안을 현장의 시각에서 제시하면서 소통과 정보공유를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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