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침몰 실제 항로 이 이미지는 1945년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항로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파란색 선은 일본 오미나토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예정 항로를, 빨간색 선은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 해역으로 향한 실제 항로를 나타냅니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협회
폭발음을 들은 인근 어부들이 작은 배를 몰고 구조에 나섰지만, 일본 해군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사고 원인과 희생자 수를 밝혔는데 원인은 '마이즈루만 해역에 남아 있던 미군 기뢰의 폭발'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인 노동자 3,725명 중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5명 중 25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 발표는 곧 의심을 샀다. 폭발 원인을 미군 기뢰 탓으로 돌렸지만, 실제로 우키시마호는 이미 '소해(바다에 부설한 기뢰 따위의 위험물을 치워 없애는 일) 완료' 통보를 받고 입항한 상태였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폭발 직전 일부 일본인 승무원이 탈출용 보트를 타고 먼저 빠져나갔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에는 일제의 전쟁 범죄와 강제 동원의 현장을 목격한 수많은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한꺼번에 제거해 증거와 목격자를 없애려 했던 것은 아닐까.
또 승선 인원과 사망자 수 역시 의문이다. 일본과 조선인 생존자들은 실제 승선 인원이 7천~8천 명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1944년 오미나토 해군 시설부의 강제노역 중 식량 부족에 항의한 조선인 319명의 폭동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같은 해 내무성 보안과 문서 <조선인 운동의 상황>에는 건설업체 사사키조 소속 644명과 11곳의 하청업체 인원, 일본 통운 50명, 미사와·가바야마 비행장 공사 인원 3300여 명이 기록돼 있다. 이를 합치면 실제 강제동원 인원은 1만 명이 넘는다.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침몰 선체 인양이었지만, 일본은 곧바로 나서지 않았다. 첫 인양은 사건 5년 뒤인 1950년, 일본이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산업을 재건하던 시기이자 6·25 전쟁이 한창일 때 시작됐다. 그렇게 끌어올린 고철은 아이러니하게도 남북한 전쟁의 살상 무기로 다시 쓰였다.
1954년 2차 인양에서는 충격적인 정황이 드러났다. 배 밑바닥의 구멍이 외부 기뢰가 아니라 내부 폭발로 생겼다는 추정을 뒷받침 할 흔적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균형장치에는 무려 360t의 거대한 돌이 실려 있었다. 돌은 원래 선박의 무게중심을 잡는 용도지만, 단거리 항해에 나선 우키시마호에 실린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 돌이 평형수 역할이 아니라, 폭발 후 선체를 빠르게 가라앉히기 위한 의도적 장치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재판부는 "정부에 법적 책임이 없고, 소송 시효가 지났으며, 피해자들이 국적을 잃어 소송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소송 기간 내내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승선명부 공개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기록이 소실됐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러나 2021년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 후세 유진(布施祐仁)이 승선명부가 일본 정부에 보관돼 있음을 밝혀냈다. 이에 일본은 2024년 5월, 명부가 포함된 19건을 시작으로 총 53건의 자료를 우리 정부에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만여 명에 달하는 승선자를 확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행정안전부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주최로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관련 유족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2024.9.26
연합뉴스
영화 <우키시마호>에는 폭발음을 들은 어민들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칠흑 같은 바다로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바다는 검은 벙커C유로 뒤덮여 매캐했고, 숨이 막혔다. 어민들은 그 속에서 "아이고, 아이고"라는 절규를 들었고, 그 순간 그들이 조선인임을 알았다. 기름은 간신히 허우적대는 사지를 옥죄었고, 곧 힘이 풀린 몸들은 기름 위에 고요히 떠 올랐다.
우리는 해방 후 재건의 열기 속에서 우키시마호와 그 안에 수장된 수많은 영혼을 잊었다. 그러나 사고 해역인 마이즈루시 주민들은 추모비를 세우고, 지금도 그들을 기억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들의 유골을 안치한 유텐지 납골당
연합뉴스
내가 10대 초반,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 "네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를 잡아가겠다"는 협박에 떠밀려 일본 군수 공장에 갔다면 어땠을까. 모욕적인 말과 주먹질, 굶주림을 견디며 해방을 맞아 우키시마호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지옥 같은 삶을 끝내고 어머니와 함께 해방을 만끽하리라는 기쁨도 잠시 한순간의 섬광과 함께 마이즈루 바다 밑에 가라앉아 영원히 떠도는 영혼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녀라면 힘없는 식민지의 딸로 태어난 억울함과 깊은 슬픔을 알아주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내 나라와 국민이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일을 멈추지 않길 바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강하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그 벅찬 감격이 곳곳에 번지고 있다. 이 감격 속에는 식민과 전쟁, 독재와 분단을 딛고 주권을 되찾아온 민중의 긴 여정이 있다. 우리는 그 발자취에 경의를 표하며 함께 춤추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마이즈루만 바다에서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는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넋을 기리며 맹문재 시인의 시 '우키시마호'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우키시마호
맹문재
왜 배를 타라고 조선인들의 마음을 띄웠을까?
...
왜 수백 톤의 돌을 실었을까?
왜 부산으로 가다가 배를 돌렸을까?
왜 조선인들을 배 아래쪽에 밀어 넣었을까?
왜 일본군은 구명정을 타고 빠져나갔을까?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귀국선이 폭발했네
만 명의 조선인들이 꿈꾼 해방이 수장되었네
왜 일본군은 사과도 진상조사도 언론 보도도 수장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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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명의 조선인들이 꿈꾼 해방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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