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칡꽃 향기를 듣다

등록 2025.08.18 11:29수정 2025.08.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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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넝쿨 척박한 환경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는 칡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칡넝쿨 척박한 환경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는 칡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이명수

여름 끝자락의 향기

입추와 말복이 지나면서부터 시나브로 바람의 숨결이 달라졌다. 한낮에는 여전히 더위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의 공기에는 가을의 서늘한 손길이 묻어난다. 낮곁에 파주출판도시 심학산 자락을 걷다 보면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있다. 바로 칡꽃이다. 그 고혹적인 향은 은연중에 스며들어 여름의 마지막 숨을 붙잡고 계절의 전환을 노래한다.


남녘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여름 끝자락에 피어나는 칡꽃 향기를 어린 날부터 숨결처럼 들이마셨다. 그러나 문학청년 시절, 그 향기를 글로 옮기려 하면 언제나 '감미롭고 매혹적인 향기'라는 좁은 울타리만 맴돌았다. 마치 숲의 깊은 그림자를 붙잡으려다 허공만 움켜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칡꽃향기 너에게 주리라>라는 책 광고를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았다. 혹시 내가 찾던 한 줄의 문장이 있을까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칡꽃의 숨결은 만나지 못했다.

그해 여름, 나는 향기를 직접 붙잡기로 했다. 칡꽃이 피기를 기다렸다가 보랏빛 속살을 드러낸 꽃잎을 떼어 입에 넣었다. 혀끝에서 번지는 것은 잘 숙성된 자두의 은근한 단맛, 멀리서 익어가는 포도주의 깊은 숨결, 저녁 들녘에 내려앉은 바람의 서늘함이었다. 말린 꽃을 차로 우렸을 때, 찻물 속에서는 쇠붙이의 차가운 기운 위에 금은화(인동초)의 은근한 빛이 번졌다. 마치 달빛이 강물 위를 건너는 순간처럼 부드럽고 서늘한 여운이 입안에 스며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향기는 글자만으로는 붙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입안과 가슴, 오래된 기억 속에 스며들어 나만의 언어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살아난다.

갈등, 풀리지 않는 얽힘의 이유

칡꽃향기 여름 끝자락, 칡꽃의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칡꽃향기 여름 끝자락, 칡꽃의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이명수

보랏빛 칡꽃은 넓은 잎사귀 사이에 숨어 피어난다. 화려함을 뽐내지 않지만, 그 고혹적이고 강렬한 향기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콩과 덩굴식물인 칡은 척박한 경사지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을 이어가며, 차와 약재, 구황작물로 오랜 세월 인간과 동행해 왔다.


칡꽃의 꽃말은 '사랑의 한숨'이다. 칡넝쿨이 나무를 휘감아 결국 시들게 만드는 생태에서 비롯된 듯하다. 칡넝쿨은 전봇대조차 사정없이 감아 오른다. 강인한 생명력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갈등(葛藤)'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감기면 풀기 어려울 만큼 뒤엉키는데, 칡은 시계 방향, 등나무는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기에 한 번 얽히면 풀 길이 없다. 이 물리적 얽힘에서 '갈등'이라는 말이 나왔다.

서로 다른 욕구와 취향이 모인 곳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칡과 등나무는 꽃 피는 시기도 다르고, 굳이 붙여놓지 않으면 자연에서 쉽게 만나지 않는다. 애초에 얽힐 이유가 없다면, 각자 향기를 내며 살아가면 될 일 아닌가?


뿌리 깊은 저력, 민족의 힘

칡꽃 칡꽃 향기를 듣다
▲칡꽃 칡꽃 향기를 듣다 이명수

칡꽃 향기에서 이어진 생각은 정치 현실로 옮겨간다. 지난해 겨울의 격랑 속에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허술해 보이기도 했지만, 되짚어 보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을 이룩한 이 나라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일부 엘리트 관료와 군인, 정치인, 탐욕에 물든 기업, 의도가 의심스러운 종교 집단,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까지 — 그들의 도덕적 결함은 이미 뚜렷하다. 그러나 이 땅을 바로 세우는 힘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불의와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시민의 목소리, 그 목소리야말로 훨씬 더 크고 깊었다. 삐걱거리는 듯 보여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는 힘, 그것은 칡처럼 뿌리 깊은 저력이다. 이 저력 속에는 우리 민족의 내재된 힘과 회복력이 고스란히 스며 있으며,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끈기와 자부심으로, 언제든 자랑해도 손색이 없는 특성이 깃들어 있다.

갈등을 넘어 화해의 꽃으로

幽聞葛花香(유문갈화향) 칡꽃 향기, 얽힌 세상을 풀어 하늘로 스미다.
▲幽聞葛花香(유문갈화향) 칡꽃 향기, 얽힌 세상을 풀어 하늘로 스미다. 이명수

본초서에는 칡에 대해 "술독을 풀고 백 가지 독을 해소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칡꽃은 숙취를 풀어 주는 '갈화해성탕(葛花解醒湯)'의 주재료이고, 칡뿌리(갈근)는 해열과 갈증 해소에 쓰인다. 칡은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되기도 하고, 나무를 옥죄는 덩굴이 되기도 한다. 이 이중성은 오늘의 정치와 닮았다. 여야와 세대, 지역과 이념이 얽히고설키며 갈등의 덩굴을 만든다.

그러나 칡꽃 향기가 여름 끝자락에 은은히 퍼지듯, 갈등 속에도 화해의 길은 있다. 갈등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히며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얽힘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요즘 나는 노자의 구절,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를 자주 떠올린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 보여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 빠져나가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사 정의로 작동하는 방식이리라.

정치적 갈등은 칡덩굴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칡꽃이 숙취를 풀어내듯, 지혜와 대화는 얽힘을 풀어낼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한 발 물러서는 여유, 공통의 목표를 향한 협력이 필요하다.

입추의 바람 속, 매미 소리가 잦아들며 칡꽃 향기가 은은히 퍼진다. 향기는 묻는다. 우리는 갈등의 덩굴을 그대로 얽히게 둘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 화해의 꽃을 피울 것인가. 나는 깊게 들이마신다. 서로를 옥죄는 덩굴이 아니라, 서로를 어루만지는 꽃이 되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칡꽃향기 #인문학적붓장난 #갈등과화해 #민족의저력 #자연에서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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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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