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 연구·교육의 큰 별, 한태동 교수를 추모하며

등록 2025.08.18 11:08수정 2025.08.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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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자이면서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음성학으로 분석해 외솔상을 받은 한태동(韓泰東) 연세대 신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5일 오전 4시15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101세.
신학자이면서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음성학으로 분석해 외솔상을 받은 한태동(韓泰東) 연세대 신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5일 오전 4시15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101세. 연세대 의대 홈페이지

존경하는 한태동 박사님의 영전에 삼가 추모의 말씀을 올립니다.

지난 15일 한태동 박사님께서는 101세의 숭고한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께서 남기신 학문 유산과 교육 열정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192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독립운동가 한진교 선생의 아드님으로,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굳건한 신념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자라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해송양행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신 독립정신은 선생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성요한대 의과대학을 졸업하신 후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하시며, 의학에서 신학으로 학문의 지평을 넓혀가셨습니다. 1957년 조국에 돌아오신 후 1990년까지 33년 동안 연세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쏟으시면, 신학뿐만 아니라 의학, 철학, 중국학, 문자학, 음성학, 동서양사상사 연구, 인지과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 연구로 새로운 학문 사유의 틀을 제시하셨습니다.

1982년 제가 연세대에 입학했을 때 이미 전설적인 명강의로 유명하셔서 국어국문학과생인 저도 교양 과목인 기독교 사상사를 3년 내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사상사 강의인데도 쏙쏙들이 쉽게 강의하시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깊은 사유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셨습니다. 큰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 앞에서 커피 한 잔과 온화한 미소로 시작되던 그 명강의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지적 희열과 학문적 감동을 주는 진정한 교육이었습니다. 한 시간의 강의로 진한 여운을 남기시며, 학생들 스스로 사유하고 탐구하도록 이끌어주신 그 교육철학은 참된 스승의 모습이었습니다. 신과대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 학생들에게도 학문적 소양을 넓혀주시며 진정한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는 신학자이면서도 훈민정음 연구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독창적이고 놀라운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1983년 '훈민정음의 음성 구조'라는 혁신적인 발표로 시작된 연구는 <세종대의 음성학>이라는 불멸의 저작으로 완성되었고, 이 업적으로 제24회 외솔상을 수상하시는 영예를 안으셨습니다. 동양의 수리철학과 음악 이론, 언어학을 아우르는 융합적 통찰로 세종대왕의 창제 원리를 밝혀내신 것은 한국학 연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훈민정음이 "모든 언어의 기틀이 되는 위대한 언어 체계"라고 하시며, "만민의 언어학의 기틀"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오늘날 훈민정음의 보편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을 보면, 선생님의 혜안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과학과 인문학, 음악을 넘나드는 진정한 융합학자로서 세종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신 선생님의 학문적 여정은 후학들에게 영원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암울했던 1980년대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으시고,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과 사유의 기쁨을 심어주신 교육자의 면모 또한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종이 열었던 "가장 자유로운 정음 세상"의 이상을 학문으로 구현하신 한태동 박사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며,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이 후학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다짐합니다. 2015년 무렵 연세대 북문 옆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뵌 저를 "질문 잘 하던 국문과생"으로 기억해 주시며,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저의 졸저를 크게 칭찬해주시던 때가 이제 더욱 그리울 것입니다.


스승님!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한태동 #세종대왕 #음성학 #훈민정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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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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