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시간된 밥, 당근, 달걀, 크래미로 둘둘 말은 김밥 책을 읽다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둘둘 말은 김밥. 이제 본격적으로 소풍을 떠나는거야!
정현주
서울에서 태어나 한 번도 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는 연재는 물의 도시, 호수의 도시 '춘하시'에 내려와 2층 펜션 자리에 복합문화공간 '소풍'을 오픈한다. 첫 손님으로 아기 엄마 혜진 팀이 와서 퀼트 모임을 하고, 취업준비생 현이 알바생으로 합류한다. 이어 요가 강사 제하가 수련 장소로 한 공간을 대여하고, 단기 대여를 했던 기타리스트 수찬이 신곡 쇼케이스를 계약하고, 연재는 글쓰기 교실을 기획한다. 이렇게 각자의 인생길에서 각기 다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복합문화공간 소풍에서 자생을 시작한다.
아기를 키우는 시간을 고립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소외시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고립, 소외, 노동, 불면, 돈 부족, 호르몬 불균형, 이 모든 것과 몸부림치는 동안
아기가 자란다. (p.19)
레몬청을 만들까 하는데 자몽이 눈에 들어온다. 왜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걸까?
그토록 간결한 삶을 원했는데, '이왕 하는 김에'라는 습관이 다시 노동을 불러온다. (p.48)
그렇게 낯선 곳의 이방인으로 소풍의 주인이 된 지 6개월. 연재의 마음처럼 빈 곳이었던 복합문화공간 '소풍'은 소소한 행사와 소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사람 향기가 차오른다. 빈손, 빈 가슴으로 각자의 상처를 안고 이 문을 열었던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며 문틈에 입을 대고 묵혀두었던 진한 호흡을 한다.
역시 답은 인간인가?
인간에게 상처받지만, 또 인간에게 위로 받는. 깊게 관계하고 싶지 않지만, 고립되고 싶지도 않은 마음, 이번에도 연재는 결론지었다. 두 마음 다 내 마음이라고. (p.81)
"그만하면 됐다"는 말은 자기 편의적 회피다. 상처 받은 눈동자를 한 번이라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p.128)
그들은 상처를 잊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낼 뿐이다. 그렇게 상처는 조용히 진물을 마르게 하고, 상처는 하나둘 껍질을 벗으며 속살을 드러낸다.
내가 겪은 일이 특별하다는 환상, 아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은 없다는 착각 속에 빠져 내 상처를 키우고 확대하고 심지어 극진히 보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패딩에 묻는 흙처럼 털어버리거나 정 안되면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고이 모셔 두었다는 것을. 그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고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다는 것을. (p.168)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니라 경이로운 꽃임을 알게 되는 건,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자 그런 삶을 견딘 사람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p.173)
소풍의 클라이맥스 시간이 다가온다. 학생 때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보물찾기였다. 그들은 어떤 보물을 찾을 것인가. 복합문화공간 '소풍'에서는 전시회 이벤트를 준비한다. 제목은 <괜.너.괜>.
괜찮아, 너라서 더 괜찮아.
저마다 마음의 상처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소풍이라는 공간에서 펼치는 위로와 치유의 시간.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 어설프게 만든 나의 김밥을 바라본다. 지금 나의 소풍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 쯤에서 쉬고 있는 건지,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산다는 건, 어쩌면 김밥 같은 게 아닐까. 색깔도 다르고, 맛도, 식감도 제각각인 개성 넘치는 재료들이 김에 둘둘 말려 하나로 둥글둥글 굴러가며 빈 속을 채우는 여정. 오도독 씹는 맛이 재미있는 당근 남편, 포슬포슬한 크래미 아들, 조심조심 얹었던 달걀 딸. 나는 기꺼이 널찍하게 몸을 눕히는 까만 김을 선택하겠다. 각기 다른 맛, 다른 색깔의 이들을 하나로 말아 열 손가락 깍지 끼듯 야무지게 감싸주는 김이 되겠다.
가끔, 톡 쏘는 사이다 한 모금에 눈을 찔끔 감을 수 있다면. 지금 나의 소풍은 "제법 괜찮아, 우리라서 더 괜찮아."
소풍을 빌려드립니다
문하연 (지은이),
알파미디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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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공중파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광고홍보 프로덕션 운영.
(현)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 /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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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장 넘기다 김밥 둘둘, 꽁다리 물고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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