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회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기사. 중앙신문 1945.11.21
중앙신문
"어떻게 왔소?"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기자증을 보여 달라는 관계자의 요청에 홍원길은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칼에 거절당했다. 주최 측이 발급한 신문기자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감시와 긴장 속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한국민주당(아래 한민당)의 지시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경운동 천도교 강당을 찾은 홍원길은 난감했다. 해방 후 좌·우익이 총결집된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 진주를 앞두고 인민위원회로 조직 전환을 꾀했다. 물론 좌파(아래 좌익)가 중심이 되어 한 일이다.
인민위원회는 부리나케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조선에 이미 독립된 민주공화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미군정에 시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인민위원회 첫 공개 행사인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는 전국의 노동·농민·사회단체 대표자들과 사회주의자, 명망 있는 독립투사들이 총집결했다.
행사 주최 측은 초긴장했다. 만일 있을지도 모르는 우익 단체의 테러를 우려해서다. 이런 연유로 대회장에 입장하는 이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홍원길이 대회장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학생동맹 회원이 신분을 감추고 대회장에 입장하려는 것을 저지하는 외침이었다.
의장석에는 허헌이 앉아 있었고, 사회는 이강국이 맡았다. 아놀드 미 군정장관이 축사를 할 정도로 당시 인민위원회 대표자 회의는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정치 집회였다. 청주에서 참석한 홍봉희가 홍원길의 눈길을 끌었다. 강당 밖에는 선전물과 책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홍원길, <청곡 회고록>, 1978).
인민위원회 대표자 회의는 미군정과 우익 세력이 초긴장하며 예의주시했던 집회이기도 했다. 특히 한민당과 우익 단체는 프락치를 보내 대회 상황을 염탐했다.
1945년 11월 20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는 충북 지역 사람들도 참석했다. 충북 대표로 조준하, 노서호, 장준, 김종우가 참여했고, 청주·청원 대표로는 신형석, 홍봉희, 소철영, 이상목, 신형식, 김영식, 노재형 등이 함께했다.
충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조준하는 일제시기 옥천군 청산(면) 소비조합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옥천군 청산면 자치위원회 조직을 주도했다. 청주 대표자 중 홍봉희는 일제시기 청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했고, 조선일보 청주지국을 운영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 지역 우익 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재인용).
농민운동 부진과 봉건 잔재... 충북 인민위원회의 구조적 한계
충북민전 조직부에 소속된 이상목은 모충동 출신으로, 후일 모스크바공산대학에 유학을 했다. 부강 출신 노재형은 조선민주청년총동맹(아래 민청) 청주시책과 동지사(同志社) 책임자를 맡았다.
청주적우연맹 주동자로 1931년 투옥되었던 신형식은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기자, 중국 <흑룡강일보> 기자로 있다가 1945년 11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충북인민위원회·근로인민당·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했다.
인민위원회 대표자 중 청주 출신은 대부분 지식인이었다. 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아래 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아래 전농) 출신이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대중적 토대가 부재한 청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세(勢)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충북인민위원회는 남문로 청주관이라는 여관에 사무실을 차릴 정도로 위상이 열악했다. 다른 도(道) 인민위원회가 관공서를 사무실로 사용한 것과 대조적이다.

▲충북인민위원회 충북인민위원회 터(청주 성안길 내)
청주시청
인민위원회와 후일 만들어진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산하에 전평과 전농을 회원 단체로 만들었다. 이는 해방 직후 좌익이 전국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청주의 인민위원회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전농 결성대회에 충북 대표로 참석한 장준의 연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충북은 13도 중에 (농민운동 세력이) 가장 적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봉건적 잔재 세력이 가장 크다. 그럼으로 모든 것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했다. 경제 문제, 정치 문제에서의 요구는 다른 도와 무이(無異)하다. 충북 10군 103면 중 (농민조합이) 조직된 것은 8개 조합과 50개 지부이다. 이것은 절반이 못 된다. 비교적 침체한 상태이다. 가장 철저한 곳은 진천, 충주, 영동이 제일이다. 이곳에서는 (소작료) 3:7제를 철저히 실시한다. 앞으로 강력하게 전개하려 한다."
충북 지역의 농민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부진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영동과 제천을 제외한 지역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청주에 주둔한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철저히 부정했고, 인민위원회가 해방 직후 발간한 신문 <통신>을 폐간시켰다.
해방 직후 좌익이 중심이 된 인민위원회와 전농, 전평의 주요 강령은 친일파 청산, 소작료 3:7제를 위시로 한 토지개혁, 하루 8시간 노동제를 포함한 노동법 제정, 민중 본위의 경제체제 수립 등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도입을 위해 좌익의 정치 이념과 정책을 전면 부정했다.
좌익 대중정당의 집결, '민전' 깃발 아래 모이다
충청북도인민위원회는 청주관에 사무실을 두었고, 중앙공원 내 도서관을 개칭한 동지사와 민전회관(현재 북문로 2가에 있는 건물) 등을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미·영·소 외무부장관) 회의 결정을 놓고 남조선에서 정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1946년 2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한반도 이남 지역의 좌파 계열 정당 및 사회주의 단체들이 집결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아래 민전)을 결성했다. 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이 맡았다.

▲충북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실 터
박만순
충북민전 초대 위원장은 부강 출신의 노서호가 맡았으며, 그는 민전 중앙위원도 역임했다. 이후 영동군 양강면 출신의 장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청주근세60년사화편찬위원회, <청주근세60년사화>, 1985). 장준은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충남북대표와 1944년 건국동맹 충남·북지부 책임자를 역임했다. 충북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이자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다.
충북 지역의 대중운동이 취약하기는 했지만, 충북민전은 좌익의 대중운동·정치 단체가 총결집한 전선체였다. 그렇기에 1946~1947년 지역 정국의 핵이었다. 민전 결성을 전후해 민전 소속 단체는 선전전과 정치 집회를 활발하게 벌였다. 전농 충북도연맹이 배포한 전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라! 농민이여 농민연합(농민회)으로!"
"모든 가난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자국의 자본주의에게 억압받는 농민들! 농민연합(농민회)의 깃발 아래 모여서 우리의 손으로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자!"
"인종 차별자, 친일파와 다른 일본의 잔재세력을 제외한 모든 인민의 대표자로 구성된 인민의 정부를 설립하자."
- 주한미군 정보보고서, 'G-2 보고서', 1945.12.8.
친일파 청산, 3:7제 소작료제, 의무교육 실시 등을 주장하며 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선전전이었다. 민청이 부강(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의 철도역과 관공서 등지에 부착한 포스터는 미국과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나는 배고파서 죽을 것만 같다. 이승만 놈 네가 풍족하게 먹는 동안 행복하겠지? 미국놈들의 좋은 차를 굴리면서 너는 단지 자신의 번영만을 생각하고 죽어가는 농민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승만 놈, 왜 조국을 팔려 하는가?"
- 주한미군 정보보고서, G-2 보고서, 1946.9.5 / 1946.9.9.
민청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부녀총동맹(충북지부 위원장 김동일, 전국 중앙위원 조창숙)에 이은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도 민전의 핵심 단체로, '한국 여성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분야에 있어서의 평등 인정과 민주적 정부 설립 지원'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다.
민전의 행동대장 격은 민청과 민주애국청년동맹(아래 민애청)이 맡았다. 미군정에 의해 민청이 불법화되자, 좌익 청년들은 1947년 7월경 민애청으로 조직을 변경했다. 민청 소년부의 충청북도 지부 맹원 1600여 명은 같은 해 10월 한 달 동안 남로당으로 편입되기도 했다(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좌익단체 시가도 청주 좌익단체 시가도
박만순
조선공산당의 몰락과 남로당의 탄생
조선공산당(당수 박헌영)은 창당 후 미군정의 주요 탄압 대상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을 터뜨려 조선공산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또한 1946년 9월과 10월에 이루어진 철도총파업과 대구 10월 항쟁에 조선공산당이 개입되었다며 정치적 공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전면 불법화되었고, 당수인 박헌영은 지명수배되었다. 박헌영은 이후 월북했다. 조선공산당 불법화 이후 좌익 세 정당은 정계 개편을 시도했다. 즉,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아래 남로당)을 창당한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이루어진 조치이기는 하지만, 미군정은 남조선(남한)에서 좌익을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좌익은 즉각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 실현을 내세우지 않고,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 경제·사회 개혁을 주창했다. 그들의 정치 노선과 정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등지에서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한 사회민주당과 유사했다.
자력으로 조선의 해방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후 미군정과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렇기에 미군정 진주를 앞두고 선포한 인민공화국이 전면 부정되자, 1945년 11월 30일 제2차 인민위원회 대표자 회의에서 국호 변경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표단과 달리 지방 대의원들은 "국호 결정은 조선인들의 자주적 판단으로 결정할 문제"라며 이를 거부했다.
남로당은 일방적 탄압을 당하면서도 미군정에 '러브콜'을 보냈다. 1946년 남로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김상주가 충청북도 군정장관을 만나 "남로당은 미 군정청과 충분히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했으나, 군정장관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1948년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추진하자, 남로당과 민애청은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선전전, 후보자 암살, 선거관리위원 테러, 투표소 파괴 등의 전술을 사용했다.
남로당 충북도당은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청주시 반동분자 제거 대상 을(乙)호 명단을 작성했다. 서병두(대동청년단 부단장), 박계택(대한민청 조사부장, CIC 문관), 홍정흠(백골단 단장, 청주제일교회 전도사), 하건홍(백골단), 이학구(대한민청 별동대장), 민영복(해방 후 청주시 초대 부윤), 박기운(태극청년단 단장) 등이 포함되었다.
민애청 역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저지 투쟁의 선봉대로 나섰다. 민애청은 조직 내에 특공대를 두어 우익 인사 암살, 방화, 습격을 주 임무로 삼았다. 특공대는 이후 빨치산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해방 후 좌익 세력이 미군정에 의해 정치적으로 전면 배제되면서, 대한민국 사회의 '좌·우의 날개' 중 왼쪽 날개가 거세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사치'에 불과했다. 좌익이 역사에서 거세된 데는 우익의 테러도 한 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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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3:7제 소작료" 외치던 충북 좌익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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