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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행세했지만 실상은 주먹패...청주 우익단체의 이중성

[청주 기억여행 1945~1960 ⑤] 주먹패와 지식인, 기독교인이 뒤섞인 청주 우익단체의 활동과 내부 갈등

등록 2025.09.01 15:47수정 2025.09.0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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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기자말]
어깨에 잔뜩 힘을 준 건달패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한 달 전까지 뒷골목에서 빈둥거리던 그들이 어엿한 애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복으로 입은 붉은 양복은 요릿집 보이나 지배인이 입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입어보는 양복에 그들의 입은 귀에 걸린 듯했다.

붉은 양복을 입은 주먹패와 의혈단

"김동지, 요즘 빨갱이 동향은 어떤가?"

"공산당(조선공산당)이니 농민회, 청년회 같은 것을 만들느라 정신없는 것 같습니다."

단장의 물음에 김모 단원이 이렇게 답했다.

"그놈들 조금만 이상한 모습 보이면 이야기 해. 작살을 낼 테니까!"

서문동의 적산(敵産) 건물에 무혈입성한 의혈단은 해방 직후 자칭 애국자처럼 시내를 활보했다. 건국 운동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들은 공갈을 치고 공짜 술을 먹고 다니는 부랑자 수준의 모임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붉은 양복을 입은 그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비록 조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해방 후 청주에 최초로 만들어진 우익단체였다. 1945년 8월 말 창립된 단체의 단장은 오창 출신 김〇조로, 그는 일제강점기 경찰을 지냈으며 유도 4단이었다. 단원 대부분은 시내에서 어깨에 힘을 주던 이들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1940~1950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해방 직후 우익단체의 등장과 활동


그해 말부터 1946년까지 우익단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이 으스스한 백골단(白骨團)은 청주제일교회 교인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전도사 홍정흠이 단장을 맡았다. 단원으로는 백홍기, 권태원, 이준기, 홍이식 등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와 반공주의의 결합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1945년 10월 3일 청신학원 교실에서 창립한 일명 '아리랑 동지회'는 주로 빨갱이를 때려잡고 벽보 선전전을 했다. 이들은 야간에는 시내에 삐라나 벽보를 붙이러 다녔는데, 누가 붙였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 가마니를 갖고 다니다가 사람이 오면 그것을 뒤집어썼다.

'일본인에게 고한다'는 벽보를 붙여 자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들은 쇠고리동지회(Iron Chain) 단원들이었다. 1945년 10월 20일 이봉복, 김용식, 김홍설, 오인탁, 이재석 등 다섯 명이 모여 쇠고리동지회를 결성했다. 소수 지식인 위주였던 이들은 주로 선전전에 집중했으며, 반탁운동과 좌익 테러 대응에도 앞장섰다.

청주에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기운은 1945년 11월 10일 태극청년단을 창립했다. 이후 자유당 조직부장을 하게 된 이명하가 주요 단원으로 활동했다. 박기운은 충주 성서동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경찰 경력도 있었다. 태극청년단은 1947년 대동청년단에 편입되기 전까지 한민당의 친위부대로 활동했다.

태극청년단 단원 서병두는 1947년 1월 14일 비밀회의를 열고 조직을 한민당 전위대로 개편시켰다. 서병두가 부단장에, 후일 <국민일보> 사회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낸 김창기가 선전부장에 취임했다. 이는 사실상 친위쿠데타 성격의 조직 재편이었다. 이후 서병두는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과 한민당 청년부장을 하게 된다.

태극청년단 역시 반공 선전전을 했다. 홍원길과 같은 조가 된 서정식(1929년생)은 풀통을 들고 석교동에서 오정목(현 방아다리)까지 대로변 전봇대와 상가 벽에 선전물을 부착했다.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서정식은 서병두의 아들이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유학생과 대한민청, 건설청년단

 대한민청 청주지부 결성식. 앞줄 흰색 와이셔츠에 '대한민청' 이라는 완창을 찬 이들은 별동대원임.
대한민청 청주지부 결성식. 앞줄 흰색 와이셔츠에 '대한민청' 이라는 완창을 찬 이들은 별동대원임. 김동수 제공

1946년 2월 창립한 유학생동맹은 보은군 산외면 출신 김규환을 책임자로, 이은전과 민한기를 중심 인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국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로 강연회를 통한 반공 활동을 했다.

1970년대 야당계 거두로 손꼽히는 유진산이 회장을, 김두한이 행동대장을 맡은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은 1946년 4월 9일 서울 종로 YMCA 강당에서 출범했다. 청주지부는 같은 해 10월 10일 결성되었다.

대한민청 청주부(淸州府) 지부장은 김철과 김동환이 맡았고, 청주의 내로라하는 주먹패들이 참여했다.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 김동수 증언에 따르면, 소위 '와샤패'로 불린 별동대는 좌익 테러의 최선봉에 섰다. 별동대는 흰색 와이셔츠와 '대한민청'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완장을 착용했다.

청주시 남부 지역 반공청년들을 중심으로 출범한 건설청년단은 1946년 5월 20일 창립됐다. 청주 최대 청년단체였던 건설청년단은 김용식을 단장으로 서재조, 전만식, 권태성, 김상로 등이 중심인물이었으며, 사무실은 김용식 자택을 사용했다.

창립 연월일이 확인되지 않은 북부청년단은 청주 우암동 대마공장을 본거지로 태동했다. 대마공장은 일제강점기에 군수공장이었으며, 종업원이 수백 명에 달했다. 해방 후 좌익은 이곳에서 노동조건 개선 등 노동운동을 벌였다. 청주에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지부가 없었으나, 전평 계열 노동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에 대한 미군정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자들 청주 직물공장에서 분규 선동. 청주에서 정전으로 최근 폐쇄된 청봉직물공장(청주직물공장: 대마공장)의 재개는 남로당원(공산주의자)인 600명의 근로자 중 120명에 의해 협박받았다.

공산집단은 모든 고용원들에게 시간 손실에 대한 완전 임금을 요구하도록 선동해 왔다. 만일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장 재개 직후 파업이 계획되어 있다. 공장은 여전히 폐쇄되어 있다(주한미군 정보보고서, G-2 보고서, 1947.12.12).

이처럼 전평 계열 노동자들은 대마공장에서 활발하게 노동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북부청년단이다. 대마공장 직원 조수석, 나호기, 최정수 등이 공장 안에 사무실을 두고 좌익 테러에 앞장섰다. G-2 보고서와 연관해 보면 북부청년단은 1947년도에 창립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학생연맹(학연)을 만들었다. 학연 충북도연맹(청주지구연맹)은 1946년 8월 초 결성되었다. 대회는 남문로1가 포목상조합 강당에서 열렸다. 유학생동맹 청주지부 학생, 쇠고리동지회 대표, 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청주지부장 등의 내빈과 학연 중앙본부의 주남성, 이병환, 정윤백, 서상길 등 대학생 6명이 내려와 격려사와 계몽 강연을 했다. 청주중학, 청주농업, 청주상업, 청주사범, 청주여중 학생 약 250명이 참석했다.

초대 위원장은 청주농업학교 이종찬이 맡았다. 청주중학과 청주농업학교 재학생이 주축이었으며, 주요 인물로는 이종찬, 이장직, 김진영, 김창환, 홍순언 등이 있었다. 사무실은 방첩대(CIC)와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이들은 방첩대로부터 정보교환과 지원을 받았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국립대학안(국대안) 찬성 운동과, 국대안 반대운동을 벌인 청주고 좌익 교사 3명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해방 후 청주에서 만들어진 우익청년단체는 지식인·기독교인·주먹패가 중심이 되어 반공을 이념으로 창립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좌익 단체 분쇄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실 습격, 여성동맹(여맹) 창립식 테러,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 시위 습격 등과 함께 대마공장 좌익 세력 제압, 좌익 교사와 학생 축출 등이 포함됐다.

"우익청년들이 일당으로 10원씩 받았다"

1946년 1월 3일 좌익단체 습격에 나선 200여 명의 우익청년들이 일당으로 10원씩 받았다는 1946년 1월 10일자 <해방일보> 기사(이충호 논문 재인용)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방 후 우익청년단체들이 자신들의 이념으로 순수하게 자발적 반공 활동을 했다는 주장에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우익청년단체의 창립과 활동에는 미군정과 CIC, 우익 정치세력이 배후에 있었다. 미군정은 남조선에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를 이식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미국인 선교사와 기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경력이 부재한 우익 정치세력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노동자, 농민, 민중들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대부분 전향하거나 소시민으로 생활한 민족주의자들에 대해 냉담했다. 반면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와 좌익에게는 민중의 지지가 상대적으로 절대적이었다.

국내 지지 기반이 취약한 임시정부 세력이나 친일 협력 혐의가 짙은 한민당은 자신들의 취약한 대중적 토대를 보완하고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애썼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우익청년단체의 후원이었다. 즉, 우익단체가 미군정과 우익 정치세력에 동원되어 좌익과 민중을 공격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우익청년단에 가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조선 사회는 실업률이 급증했다. 대다수 지식인과 청년들은 실업자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익 정치세력이 후원하는 청년단체는 메리트가 있었다. 숙식을 제공하고 취업을 알선해 주었기 때문이다(임나영, 1945~48 우익청년단 테러의 전개 양상과 성격, 韓國史論 5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09). 물론 간부들의 단체 창립 이유는 정치적 욕망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미군정·우익 정치 세력과 우익 청년단체의 결합은 미군정 내내 유지되었다. 특히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은 그 활동의 극점에 이른 단체였다. 미군정이 종료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청년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익청년단체 내부 갈등

청총 청총 청주 회원 일동.
▲청총 청총 청주 회원 일동. <청주근세60년사화>

해방 후 우익단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지면서 이들은 좌익 테러에 연합전선을 펼쳤다. 대부분의 단체가 회원이 소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동지의식은 그리 투철하지 못했고, 내부의 알력과 갈등도 상당했다.

대한민청은 '와샤패(주먹패)'로 소문나 우익단체 내에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전 학생연맹 충북지부 위원장 이종찬은 쇠고리동지회가 대한민청 사무실 앞에 "너희들은 주먹질하는 놈들이다"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렸다고 증언했다. 대한민청 충북도단부 선전부장 최동찬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대한민청이 와샤패가 많이 있어서, 그 이미지가 좀 흐리니께. 이 대한민청 하면은 조금 머리가 깨인 파하고, 와샤만 하는 와샤파하고 두 파가 있었어. 그래 이짝을 행동대 별동대라고 그랴, 와샤파를. 별동대는 어디 타도하러 간다고 하면 출동하고 그랬거든. 그래 인저 먹물 조금이라도 들은 사람은, 먹물 들어서 글자는 조금 쓸 줄 알고, 읽어볼 줄 아는 사람은 조금 사렸지. 그래 대한민청에서 있다가 안 되겠다 해서 내가 탈퇴를 했지."

1947년도에 만들어진 대동청년단과 청년조선총동맹(청총, 1대 단장 김철, 2대 단장 서병두)과의 갈등도 심각했다. 청총 일부 회원이 미군들에게 양갈보(서양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낮잡아 이르는 말)를 제공해 돈을 벌었다.

이에 분개한 대동청년단 김흥권, 백상기, 최동찬 등이 청주약국 앞에 있던 청총 사무실을 부수었다. 청총에서는 CIC에게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신고했다. CIC에 붙잡혀간 이들은 몰매를 맞아야 했다.
#의혈단 #와샤패 #테러 #대한민청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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