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정당 시가도 청주 우익정당 시가도
박만순
봄이 왔건만, 이슥한 저녁 시간에는 아직도 쌀쌀한 날씨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젊은이 몇 명은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청주 최대의 저택으로 접근했다. 담을 훌쩍 넘은 이들은 민정식이 거주하는 사랑방으로 다가갔다. 이들은 마당에서 사랑방을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청주 최대의 갑부 민정식을 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수류탄은 민정식이 잠자고 있던 사랑방이 아니라 대청마루에서 터졌다. 민정식은 십 년 감수했다. 그는 구한말 청주 마지막 군수를 지낸 민영은(1870~1943)의 아들이었다. 민영은은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를 역임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전투기 충북호를 헌납한 소위 만석꾼이었다.
민영은의 아들인 민정식(1907년생) 역시 청주를 대표하는 부호였으며, 이승만 계열의 한민당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한독당은 민정식이 자신들에게 정치 후원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범인 노병환이 잡힌 것은 1948년이었다. 범인이 늦게 검거된 이유는 청주 경찰서 주요 간부가 한독당 계열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민정식 가옥 수류탄 투척 사건이 있은 다음 날, 한독당 청년단원인 김모와 최현묵이 민정식으로부터 30만 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 최현묵 증언).
한민당과 한독당의 충북 내 정치적 갈등
하마터면 사람이 죽을 뻔했던 이 사건은 청주에서 한민당과 한독당 간의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보여준다. 해방 직후 충북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결집한 우익은 임정 세력이었다. 충북 지역에서 김구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1945년 11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귀국한 후인 12월 초, 충북 전역에서는 김구를 지지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독당 충북도당이 창당되었다.
한민당은 한독당보다 뒤늦은 1946년 6월 7일 청주지구당을 결성하고, 7월 31일에는 충북도당을 결성했다. 사무실은 충북도당 위원장인 이희준의 청주주조주식회사 내에 두었다. 충북도당의 주요 간부는 위원장 이희준, 부위원장 김동환, 총무 남상익·김재홍, 정치부장 홍원길, 조직부장 민형식, 노농부장 이정현, 청년부장 서병두였다. 이외에도 청주 유지인 민정식과 초대 청주 부윤(府尹) 민영복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친일 협력 혐의가 짙은 인물들이었다. 남상익은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대한제국 시기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일제시기에는 진천금융조합장과 진천면장을 역임했다. 김재홍은 탄피 등 군수품 공업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병두는 청주 경방단(警防團) 간부를 지냈다. 경방단은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관제 단체로, 방공, 소화, 수방 등을 위한 훈련과 실무를 담당했다.
민영복은 국민총력연맹 이사를 역임했다. 즉, 한민당 청주·충북도당의 핵심 간부들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은 독촉중협과 독촉국민회, 한민당을 친일파들의 소굴로 인식했다. 우익 청년 단체나 우익 정당인 한독당에서도 그런 시각이 뚜렷했다.
한민당과 한독당 간의 갈등이 치열했지만 우익 세력이 결집되는 계기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의 청주 방문이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1946년 3~5월) 결렬 직후, 이승만은 남조선 정치 투어를 시작했다. 남조선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 활동이었다.
1946년 6월 8일, 청주에는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이승만 박사를 환영하는 대회가 열린 석교국민학교 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회는 한독당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독촉국민회 충북지부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개회사는 한민당 충북도지부장 이희준이 맡았다. 그는 대회 경비로 5만 원을 부담했다.
환영 대회를 마친 이승만 일행은 문화동 민주식 별장(현재의 명장사 터)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철야 경호를 맡았다. 이승만은 다음 날 숙소 정원에서 청년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승만의 청주 방문 행사를 계기로 우익세력의 총결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승만 계열(한민당)과 김구 계열(한독당) 간의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충북의 당선자 3명은 모두 독촉국민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북부 지역에서 당선된 황철성과 남부 지역에서 당선된 송종옥은 한독당 소속이었다. 청주가 포함된 남부 지역 선거에서는 한민당의 김동환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즉, 한독당 계열이 독촉국민회를 지배하고, 한민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하지만 1947년 하반기 들어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의 중심이 서서히 한민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가 이승만 계열로 진용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친일 협력 혐의자와 지역 유력자들이었다. 돈의 힘은 막강했다. 한민당은 우익 청년 단체에 대한 영향력이 갈수록 증가했으며, <국민일보>에 대한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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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계열의 충돌, 민정식 살해 미수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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