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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계열의 충돌, 민정식 살해 미수 사건의 진실

[청주 기억여행 1945~1960 ⑥] 우익정당의 형성과 갈등, 충북지역 한민당과 한독당의 대립

등록 2025.09.08 13:20수정 2025.12.1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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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질문에 비서가 답했다. 이승만은 애가 탔다.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 건국 운동이 시급해졌지만, 자신은 아직도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8일부터 이승만은 미 국무부에 조선으로의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국무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국무부는 일본의 패전 후 한반도를 소련과 정책 협조를 통해 공동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공주의자이자 철저한 반소련파인 이승만의 귀국을 허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후각은 미 국무부를 능가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 중심의 반공체제가 한반도에 수립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8월 27일에는 조선 북부 대부분의 지역에 군을 주둔시켰다. 이에 놀란 미국은 즉각적으로 3.8선을 그었고, 9월 8일 미군은 남조선에 진주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승만과 '같은 피'를 나눈 맥아더는 남조선에 확고한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이승만의 귀국에 적극 협조했다. 그 결과, 이승만은 10월 4일 맥아더와 함께 워싱턴을 출발해 10월 14일 일본 도쿄를 경유한 후,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정치조직 결성


이승만 기념촬영 교회청년들이 청주를 방문한 이승만 박사 내외와 함께 (1947)
▲이승만 기념촬영 교회청년들이 청주를 방문한 이승만 박사 내외와 함께 (1947) <청곡회고록>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로 명성을 떨친 이승만은 국내 지지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그 조직이 바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아래 독촉중협)였다.

독촉중협은 중앙 조직의 구축에 앞서 지방조직부터 시작했다. 1946년 1월 초, 전국 80여 개 지회를 설치했고, 충청북도에도 그 해 지부가 만들어졌다. 1946년 2월 6일과 8일, 독촉중협 선전총본부 주최로 열린 지방 도지부 대표 회의에 충북 대표로 장응두와 전병수가 참여했다.


장응두는 충북 청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청주지국 기자이자 <동아일보> 옥천지국 고문을 지냈다. 전병수는 충남 연기군 출신으로, 연기에서 청년회를 조직하고 3.1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만주로 건너가 친일파가 설립한 만주보민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 지역 우익 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재인용).

반면 이승만보다 뒤늦은 1945년 11월 23일에 귀국한 김구의 임시정부(아래 임정) 세력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미군정이 임정을 공식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외 정세에 둔감했던 그들은 '임정 봉대론'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임정을 신생 조국의 정통적인 정부로 추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군정과 국내 정치 세력들은 이들의 요구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민족해방운동, 특히 노동·농민·청년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과 김구 세력은 결국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우익 정치 세력의 총단결을 명분으로 만든 조직이 바로 독립촉성국민회(아래 독촉국민회)였다. 이는 이승만의 독촉중협과 김구의 반탁총동원위원회 합작품이었다.

독촉국민회 충북지부와 친일 협력자들

1946년 2월 15일 결성된 독촉국민회 충북지부의 임원에는 친일 협력자가 전진 배치되었다. 충북지부장 구연직, 부위원장 조대연, 선전부장 홍순복, 회원 한정구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구연직은 일제강점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충청노회지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 조선예수장로회가 개편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충청교구장으로 활동했다.

조대연은 일제시기 충청북도 도평의원, 충주면협의원, 충주군 엄정면장, 충주금융조합장, 충주 <매일신보> 지국장 등을 역임했다. 홍순복은 <매일신보> 충북지사장, 국민총력 충북연맹 이사를 역임했다. 한정구는 만주길림성개척단장을 역임했다.

물론 독촉국민회 충북지부에 참여한 모든 인사가 친일 협력자는 아니었다. 도지부 총무부장이자 청주지부장 장응두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었고, 핵심 회원 김동환은 신간회 청주지회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친일 협력자들과 지역 유지가 결합된 독촉국민회는 산하에 청년회를 두었다. 독촉국민회 청년회는 다른 우익 청년 단체들과 연합해 좌익 단체 및 민중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독촉국민회는 1946년 초부터 반탁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1948년에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의 정치적 중심에도 자리잡았다.

그런데 충북 지역에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독촉국민회 초창기에는 임정 계열이 세력의 중심에 섰다는 점이다. 충북도지부의 주요 임원이 이승만 계열이었지만, 활동의 중심 세력은 임정과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아래 한독당)이었다.

이 상징적인 사건은 1947년 초에 일어났다. 1946년 12월, 이승만이 도미(渡美) 외교를 위해 출국한 상황에서 김구의 임정 계열이 우익 진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촉국민회 청주지부는 1947년 2월, 이승만에 대한 지지 철회를 발표하였다.

충청북도의 우익 세력은 이승만 박사가 남한만의 조기 총선 계획을 포기하고,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결정은 홍순복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김구의 민족국회 참석 후 돌아와서 이를 제시했다고 한다(주한미군 정보보고서, G-2 보고서, 1947년 9월 13일자). 물론 이후 독촉국민회 청주지부가 일관되게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민정식 살해 미수 사건

우익정당 시가도 청주 우익정당 시가도
▲우익정당 시가도 청주 우익정당 시가도 박만순

봄이 왔건만, 이슥한 저녁 시간에는 아직도 쌀쌀한 날씨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젊은이 몇 명은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청주 최대의 저택으로 접근했다. 담을 훌쩍 넘은 이들은 민정식이 거주하는 사랑방으로 다가갔다. 이들은 마당에서 사랑방을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청주 최대의 갑부 민정식을 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수류탄은 민정식이 잠자고 있던 사랑방이 아니라 대청마루에서 터졌다. 민정식은 십 년 감수했다. 그는 구한말 청주 마지막 군수를 지낸 민영은(1870~1943)의 아들이었다. 민영은은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를 역임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전투기 충북호를 헌납한 소위 만석꾼이었다.

민영은의 아들인 민정식(1907년생) 역시 청주를 대표하는 부호였으며, 이승만 계열의 한민당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한독당은 민정식이 자신들에게 정치 후원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범인 노병환이 잡힌 것은 1948년이었다. 범인이 늦게 검거된 이유는 청주 경찰서 주요 간부가 한독당 계열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민정식 가옥 수류탄 투척 사건이 있은 다음 날, 한독당 청년단원인 김모와 최현묵이 민정식으로부터 30만 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 최현묵 증언).

한민당과 한독당의 충북 내 정치적 갈등

하마터면 사람이 죽을 뻔했던 이 사건은 청주에서 한민당과 한독당 간의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보여준다. 해방 직후 충북에서 가장 먼저 세력을 결집한 우익은 임정 세력이었다. 충북 지역에서 김구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1945년 11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귀국한 후인 12월 초, 충북 전역에서는 김구를 지지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독당 충북도당이 창당되었다.

한민당은 한독당보다 뒤늦은 1946년 6월 7일 청주지구당을 결성하고, 7월 31일에는 충북도당을 결성했다. 사무실은 충북도당 위원장인 이희준의 청주주조주식회사 내에 두었다. 충북도당의 주요 간부는 위원장 이희준, 부위원장 김동환, 총무 남상익·김재홍, 정치부장 홍원길, 조직부장 민형식, 노농부장 이정현, 청년부장 서병두였다. 이외에도 청주 유지인 민정식과 초대 청주 부윤(府尹) 민영복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친일 협력 혐의가 짙은 인물들이었다. 남상익은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대한제국 시기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일제시기에는 진천금융조합장과 진천면장을 역임했다. 김재홍은 탄피 등 군수품 공업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병두는 청주 경방단(警防團) 간부를 지냈다. 경방단은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관제 단체로, 방공, 소화, 수방 등을 위한 훈련과 실무를 담당했다.

민영복은 국민총력연맹 이사를 역임했다. 즉, 한민당 청주·충북도당의 핵심 간부들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은 독촉중협과 독촉국민회, 한민당을 친일파들의 소굴로 인식했다. 우익 청년 단체나 우익 정당인 한독당에서도 그런 시각이 뚜렷했다.

한민당과 한독당 간의 갈등이 치열했지만 우익 세력이 결집되는 계기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의 청주 방문이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1946년 3~5월) 결렬 직후, 이승만은 남조선 정치 투어를 시작했다. 남조선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 활동이었다.

1946년 6월 8일, 청주에는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이승만 박사를 환영하는 대회가 열린 석교국민학교 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회는 한독당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독촉국민회 충북지부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개회사는 한민당 충북도지부장 이희준이 맡았다. 그는 대회 경비로 5만 원을 부담했다.

환영 대회를 마친 이승만 일행은 문화동 민주식 별장(현재의 명장사 터)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철야 경호를 맡았다. 이승만은 다음 날 숙소 정원에서 청년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승만의 청주 방문 행사를 계기로 우익세력의 총결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승만 계열(한민당)과 김구 계열(한독당) 간의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충북의 당선자 3명은 모두 독촉국민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북부 지역에서 당선된 황철성과 남부 지역에서 당선된 송종옥은 한독당 소속이었다. 청주가 포함된 남부 지역 선거에서는 한민당의 김동환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즉, 한독당 계열이 독촉국민회를 지배하고, 한민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하지만 1947년 하반기 들어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의 중심이 서서히 한민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가 이승만 계열로 진용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친일 협력 혐의자와 지역 유력자들이었다. 돈의 힘은 막강했다. 한민당은 우익 청년 단체에 대한 영향력이 갈수록 증가했으며, <국민일보>에 대한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민정식별장 #이승만환영대회 #친일협력자 #한민당 #한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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