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지휘서 진홍운이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는 집행지휘서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아가, 이 편지가 뭐냐?"
"형무소에서 온 거네요."
시어머니의 물음에 며느리 홍양임이 답했다.
"읽어봐라."
편지에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급한 일이 있으니 돈을 갖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돈의 규모가 집을 팔아야 할 정도였다. 내용은 모르지만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안복순은 집을 팔았다.
거액의 돈을 들고 안복순이 대구형무소로 갔다. 면회를 하기 전에 표문(정문)에서 면회 신청을 했다. 그곳에는 어떤 형무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안복순이 갖고 온 돈을 받기 위해서다. 거의 기다시피 나온 진홍운은 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상태였다. 진홍운은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홍양임이 면회를 갖다온 지 몇 개월이 지나 대구형무소에서 다시 편지가 왔다.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니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안복순은 남편이 완전히 석방되는 줄로 알고 엉덩춤을 추며 형무소로 갔다. 1952년 3월 22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석방이 아니었다. 폐렴으로 죽기 직전의 상황이니 임시로 형을 집행 정지시켜 출옥시키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남편을 부축해 심천행 기차에 올랐다. 심천역에 도착했을 때 진홍운은 거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심천에서 소 구루마를 빌렸다. 그 위에 진홍운이 누웠다. 진홍운의 생가인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는 10리(4km) 길이었다.
"여보, 돈은 받았어요?"
"뭔 소리여!"
지난번 면회 가서 건넨 돈을 형무소에서 꿀꺽 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풀려난 그는 한 달 만에 사망했다. 1952년 4월이었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과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들의 고통, 연좌제
해병대에서 제대한 진호진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가 형집행 정지로 출옥해 심천에서 소 구루마를 타고 청성면 묘금리로 갔다는 이야기에 눈앞이 뿌얘졌다.
제대 후 바로 복직이 되지 않았다. 일종의 연좌제였다. 아버지가 부역죄로 15년 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형(天刑)을 짊어진 진호진은 시골에서 묵묵히 농사일에 전념했고 장날에는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6년 가을에 지인(학교 교장)의 소개로 영동군 양강국민학교 산막분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정교사가 아닌 준교사였다. 6.25 전 5년간 정교사로 근무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이후 영동군 학산, 양산, 이수국민학교에 재직했다. 특히 학산과 양산초등학교에서 재직하는 6년 동안 오롯이 6학년 담임을 맡았다. 당시에는 중학교 진학이 시험제였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중학교에 많은 제자들을 입학시켰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인생의 먹구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직전이었다. 신원조회(연좌제)로 인해 계속 교직에 있기가 힘들어 결국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6.25 때 행적이 아들의 삶을 옥죄게 했다.
진호진은 1972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서울의 종이재생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삼원제지 공장으로 동서와 처형 내외가 운영하는 공장이었다. 이곳에서 진호진은 공장 경비를 섰고, 아내 홍양임은 함바집을 운영했다. 직원들의 하루 세끼 식사를 책임진 것이다.
교사로의 복귀
묵묵히 종이재생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진호진의 마음속에는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꿈이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사재임용 채용시험이 있었다. 4: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1980년 신도국민학교에 발령이 나서 1994년 갈현국민학교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정년퇴직 후 등산과 붓글씨로 소일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추도일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들은 진방주는 아버지 진호진에게 "아버지가 겪은 역사를 기록해 보세요"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면 당연히 아버지 진홍운의 억울한 죽음과 연좌제에 의한 자신의 피해를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가슴 한 켠에 또아리를 틀은 마음의 상처가 덧나는 것이 무서웠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진방주는 아버지에게 금강산 구경과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삼촌 진동하를 신청해보면 어떨지 물었다. 하지만 진호진은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그만큼 그가 겪은 전쟁의 상처는 크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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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팔아 남편 구하러 갔지만... 형무소서 돌아온 건 뼈만 남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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