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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이었다. 상복을 입은 것도,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에게서 "아빠가 곧 갈 거니 준비하고 장례식장으로 와라"라는 전화를 받고 언니까지 셋이 그곳에 간 기억이 난다. 장례식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집안 어른들이 바빴다.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장례식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안 울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같이 살기도 했는데 왜 눈물이 안 났을까.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 교류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가족들이 가도 나는) 할아버지댁에 전처럼 자주 가지 않았다. 가면 인사를 하기는 했다만, 할아버지는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만 계셨기에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없었다. 거리가 생겨 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내 삶을 크게 흔들 일은 아니었다.
그런 내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터트린 건 장례식 며칠 후 할아버지 방을 정리하며 방문 앞에 놓인 고장 난 손목시계를 발견했을 때였다.
강정아의 <모르는 사람>에서는 몇 년 간 연락조차 하지 않고 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고독사로. '사망확인서의 사인(死因)란'에는 '불상(不詳)'이라고 적혔다.
일기처럼 '월요일'이라고 제시하며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나'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장례식 후 일주일 간의 모습을 담았다. 그가 보내는 일주일에는 장례식 후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것의 준비 과정, 아버지와의 과거, 그 사이 일어난 어느 유명인의 죽음 등의 이야기가 회상을 통해 교차되며 전개된다.
누군가가 죽어야 돈을 버는 사람들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죽음으로써 돈을 버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운구 업체, 상조회사, 특수 청소업체 등. '나'의 엄마는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며 무당에게까지 돈을 쓴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상품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이 낯설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일이다. 장례지도사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 사이에 팸플릿을 들고 와 장례에 필요한 상품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르게 했다. '나'는 "그냥 다 싼 걸로 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고 참는다. 장례식은 차차 진행된다. 아버지가 살던 집을 정리하고, 그의 옷을 태우기도 한다.
장례 절차로 친다면 어찌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작가는 이 과정에 여러 위화감을 일으킨다.
'나'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 혼자 죽어갔을까.
그렇게 모르는 사이가 된다
아버지는 '악다구니가 오가고 폭력과 파괴가 일상'이고, '술에 취해 부수고 때리고 욕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가족들은 하나둘씩 그를 떠났다. '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먹을 음식을 놓고 나왔고, 후에도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채워주었다. 오빠가 결혼한 후에는 올케가 그 일을 했다.
올케는 '나'의 집안 사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연결하고자 생일 파티를 하거나 가족사진을 찍는 등 애를 썼지만, 꼭 누군가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며 싸움으로 번졌다. 올케도 가망 없는 일에 더 애쓰지 않았다. '갈수록 자기에게 굴복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더 화를 내는 아버지와 그의 말을 듣기에는 너무 크거나 변해 버린 나머지 가족들 사이 대립은 견고해지며 해체되었다.
엄마는 한 번 '다시 아버지와 살아 보겠다고, 며느리 사위도 그렇고 손주들 보기 민망하니 같은 집에서 살긴 살아야겠다고, 그렇지만 그 동네에 다시 들어가 살기는 남우세스러우니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집을 새로 구했지만, 곧 또 다시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동생의 집에 가서 조카들 앞에서까지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런 아버지와 싸웠다. 아버지는 모든 가족들의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했고,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다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냥 살던 곳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 <모르는 사람> 중에서
'나'는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면서 그가 그랬을 리 없는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고 아주 잠시 아버지가 살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내 그것을 접어 버린다.
설사 타살이고 전말이 밝혀진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고, 더욱이 아무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우주에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기를 원하기는커녕 아버지가 한때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조차도 없던 일처럼 지워지기만을 바랐다. - <모르는 사람> 중에서
그런 사연이 있지만 '나'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이 기다려왔던 일, 아무렇지 않은 일인 듯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울고, 애인인 준제와 술을 마시다가도 운다. '후회'의 감정은 아니다.
이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아이러니를 역설한다. 서로 선택한 적 없지만 사랑을 하고, 묶이기 위해 노력을 하고, 남들에게도 안 할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 언제든지 얼마든지 해체될 수도 있는 것.
'나'는 어릴 적에는 아버지 손을 잡고 사진을 찍기도 했고, 아버지 무릎 위에 앉기도 했다. 전보다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서도 가족 사진을 찍는 등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서로를 묶어보려는 시도'를 몇 번은 했었지만 끝내 멀어졌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에야 그를 다시 만났다.
아버지는 남에게는 '경우 바른 사람'이었다. "점잖고 정 많은 분이셨는데",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러 오셨을 때 과일을 사 가지고 오셨어요", "굉장히 매너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라는 말이 따라붙는. 아버지가 집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가족에게는 왜 그랬는가, 미안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답을 알지 못한다.
단절된 가정은 서로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모르는 사이가 된다. 모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더는 돌이킬 수도, 회복할 수도 없게 되었다. 치유 또한 불가능해졌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었을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더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와해된 가족 관계와 그가 남기는 상처, 그 끝에는 남겨진 이의 울분을 느끼게 한다.
죽음으로 소멸되는 삶
장례식이라는 이성적 절차를 지나 감정적 죽음은 점차 지워진다. '사망확인서'와 함께 서류상의 아버지 이름도 하나둘씩 정리된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 하나의 존재가 무감정한 돈으로써 빠르게 사라진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집에 남아 있던 것들(오빠가 한때 열과 성을 다해 수집했던 우표, 가족 앨범, 동생의 머리핀과 싸구려 장식품 등)이 폐기 처리되며 함께 사라진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나'가 쓰다 말다 했던 일기장 하나만 살아 남는다.
작품을 쓴 강정아는 수상 소감에서 "〈모르는 사람〉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을 전제로, 죽음의 형태가 한 존재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마지막(결과)으로써 그 일을 판단하곤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처럼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한다. 끝이 안 좋으면 안 좋은 걸까. 혼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는 고독하고 불행한 존재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고독한 아버지의 존재는 그렇게 사라져도 되는 걸까.
<모르는 사람>은 고독사 후 존재가 지워져가는 아버지를 통해 '분리된 가족의 모습'과 '죽음 후 소멸되는 한 사람'의 모습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유명인은 리무진을 탔고, 언론은 떠들썩했다. 아버지와는 대비되는 죽음이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의 죽음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쩐지 허무하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에게 분함이 남아 있던 주인공은 이 허무함과 시시함에 동참한 듯했지만 끝내 '그래도 되는 걸까'를 자문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작품 하나가 있었다. 지난 2018년 제19회 이효석문학상에서 당선된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최옥정)>이라는 작품이다. 죽음 앞에 선 주인공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 작품에 이런 문장이 있다.
생각보다 죽음은 조용하고 일상적이었다. 더 놀라운 건 죽음이 굉장히 빨리 잊힌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이 없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던 극도로 의존적이던 가족도 죽음과 함께 후닥닥 자기 자리를 찾았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을 금방 자유롭게 했다. 죽음은 기다리는 일이 어렵지 막상 일어나면 그냥 일상일 뿐이다. - 최옥정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 의자> 중에서
작품 끝에서 '나'는 아버지의 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나'도 지금의 눈물이 무색하게 얼마 후 일상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마치 아버지의 죽음은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하지만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한 존재가 그토록 철저하게 소멸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함께 보낸 생을 삭제한) 우리의 삶 또한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사라졌다지만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을 읽고 오랜만에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는 홀로 누워 있는 그 방에서 외로웠을까. 힘이 나지 않아 대답을 잘 하지 못할 테지만 손자, 손녀가 다가와 말을 붙여주길 바랐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주인공의 '원망과 의문과 회환' 섞인 숨은 우리에게 그 어떤 답을 주지 않는다. 어떤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겨둔 채, 언젠가 '나'가 되었다 아버지가 될 우리의 삶을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이토록 쉽게 고립되고 단절되는 쓸쓸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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