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성 남한산성 서문에서 바라 본 한성백제의 도읍지. 서문을 내려가면 마천과 가락이고, 지천으로 석촌고분을 지나면 송파와 삼전도다. 삼전도 땅바닥에 인조의 이마가 닿았다. 인조가 걸은 굴욕의 길이기도 하다.
이영천
연이어 성안 식량이 바닥을 보인다. 추위와 굶주림에 모두 아사 직전이다. 1월 14일 처음으로 군졸이 얼어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의 바탕을 헤아릴 재주가 내겐 없다. 싸움을 주장한 김류나 김상헌 같은 고관대작이, 창칼을 들고 저 극한 상황의 성첩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올라가 봤을까?
1월 19일 실록은 '오랑캐가 성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 탄환이 거위알만 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홍이포 폭탄이 이때 처음 성안에 날아들었다.
같은 달 24일 실록은 '적이 대포를 남격대 망월봉 아래에서 발사했는데, 포탄이 행궁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한다. 망월봉은 벌봉으로 추정한다. 해발 522m 남한산 정상 북쪽이다.
다음날에도 포격이 있었다. 실록은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라고 기록한다.
26일에서야 22일에 함락된 강화도 소식이 남한산성으로 스며든다. 홍이포 공포와 강화도 함락 소식은 이제 추위와 배고픔을 벗어날, 비겁하지만 매우 절실한 결정적인 명분으로 변신한다.
주전파와 주화파
무척 어려운 명제다.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난제다. 당시 주전파의 논리란 현재의 시각과는 천양지차다. 주화파의 그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항복을 주전파는 명나라 은혜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주화파에 '임진왜란 때 은혜를 어찌할 것인가?'라며 울부짖는다. 재조지은에 대한 배은망덕이란다. 이면에는 '어떻게 오랑캐에게'라는 오만도 깃들어 있다. 청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는 사대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당연지사다.

▲남문 남한산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 접근성이나 지형으로 보아, 도성으로 들고나는 산성의 관문이었다.
이영천
주화파는 우선 살자고 주장한다. 그들 안중에도 물론 백성은 없다. 국체인 왕과 세자를 보호해 위기를 넘기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후에 봉림대군이 왕이 되어 구호 뿐인 북벌을 외치기는 한다. 남한산성에서 그들 주장이, 북벌이라는 미래 부국강병에까지 잇닿았는지는 의문이다.
두 주장을 선의로 재해석해 본다. 주전파는 항복을 굴욕으로 보았다. 싸우다 죽는 게 명예롭다고 여겼다. 국격과 자존의 훼손은 물론 역사에 기록될 비겁을 두려워했음이 분명하다.
주화파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순응하고, 지배 계급의 생명과 재산이 우선이라고 여겼을 터다. 꺼져 가는 명나라를 숭상하며 소 중화 사상까지 들먹이는 허세를 견딜 수 없어했는지도 모른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세에서 국익이 무엇인지 세세히 따져 실용적으로 대처하자는 주장이다. 21세기 남한산성에 갇힌 당신이라면 어디에 손들겠는가?
동쪽을 향해 앉은 행궁이 제법 상서롭다. 행궁 뒷산 수어장대 위용도 자못 볼 만하다. 4백 년 전 굴욕의 상황에도 저러했는진 모르겠으되, 자태만으론 당당한 행궁으로써 위용을 갖춘 셈이다.
당시 백관들은 어땠을까? 윤집과 오달제는 스스로 잡혀감으로써 주전파 의리에 충실했다. 김상헌과 정온은 실패한 자결이나마, 목숨을 내걸었다. 최명길로 상징되는 주화파 여생도 순탄치만은 못했다. 1643년 최명길이 청에 끌려가 2년간 억류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고관대작들 실상이 꼭 명분과 실리만을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주전이나 주화를 주장한 신료들은 그래도 주관과 소신이 뚜렷한 부류일 수 있다.

▲수어장대 남한산성은 4방향에 각 장대를 두었다. 이곳 서문 쪽 장대를 수어장대라 하였다. 수어장대 바로 아래가 행궁이다, 산성의 공간구조와 방어, 주둔 등을 최대한 교려한 결과로 보인다.
이영천
왕이 치욕의 항복 예를 마치고 창경궁으로 향한 1월 30일 실록 끝자락에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나루의 병사들은 거의 죽고 빈 배 두 척 뿐이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는 내용을 보자면 쓴 웃음을 금하기가 힘들다.
산성에 갇힌 46일의 역사가, 현재를 짓누르는 듯하다. 짙은 청록의 남한산성 숲 사이로 화창하게 파고든 날카로운 햇살이, 이끼 낀 성벽을 싹둑 베어버리는 느낌이다. 씁쓸함이 더해온다. 아둔한 왕 앞에서 머릴 조아리며 싸우자, 화친하자 맹렬하게 쟁투했을 그들의 얄팍한 속내가 날 것으로 밀려 들어서다.
더불어 산성의 이런 응답도 같이 들려온다.
'모든 다툼의 바탕에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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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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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글자 넣자 빼자, 한심한 싸움에 백성은 죽어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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