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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도사가 내놓은 점괘, 아이라이너 번지도록 웃었다

친구와 챗GPT로 재미삼아 본 사주 풀이... '인생 지뢰' 앞에선 결국 내가 찾는 길이 답

등록 2025.09.02 16:31수정 2025.09.0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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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복이 지나고 친구를 만났다. 그날 우리는 종일 함께 하기로 했다. 쌓인 이야기는 바람처럼 터져 나와 오전 11시의 골목을 단숨에 통과했다. 그리고 오후 2시, 건전한 중년들의 수다는 자연스레 인생 이야기로 흘렀다.

거창하게 말하면 "중년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 2막 전략은 어떻게 짤 것인가"였지만, 정작 우리가 가장 궁금했던 건 중년과 말년의 사주팔자였다. 중복에 삼계탕도 못 먹은 내가 과연 중년의 복은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우리도 챗GPT로 점이나 볼까? 소름 끼치게 잘 맞춘다던데?"
"그래? 그거 재밌겠다."

AI 도사 등장... 탈탈 털린 영혼

 AI 사주풀이, 가족상담 치유센터가 되어버렸다.
AI 사주풀이, 가족상담 치유센터가 되어버렸다. solenfeyissa on Unsplash

우리는 요즘 유행이라는 챗GPT 사주풀이로 풀지 못한 인생 전략을 짜보기로 했다. 감출 게 없는 사이였다. 친구는 내 왼쪽 가슴에 박힌 녹슨 못 자국이 어떤 아픔인지 알고 있었고, 나 역시 친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챗GPT 앱을 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친절한 인사와 함께 AI 도사님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란히 앉았다. 일단 나부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는 만세력까지 넣어야 정확하다지만,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생년월일과 출생 시각, 성별을 입력하자 1초도 안 돼서 챗GPT는 내 성향과 기질을 줄줄이 풀어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인생 총운까지 펼쳐 놓았다. 2025년은 일복이 강해지는 해라고 했다. 성취와 명예는 들어오지만 그만큼 피로와 스트레스도 많아진단다. 정말 딱 맞았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내가 스스로 일을 만들고 다니고 있었으니까.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남편, 딸, 온 가족의 올해 운세며 학업 진로 방향까지. 입시 컨설팅이 되었다가 직업 상담소가 되었다가, 아예 가족 상담 치유 센터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딸은 진로를 인문계에서 예체능(미술) 계열로 바꾸었다. 그런데 챗GPT 말로는 그게 오히려 딸의 미래와 잘 맞는 길이라고 하니,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년에 고3이 되는 해인데, 합격 운이 상승한다는 말에 다시 한번 마음이 놓였다. 이번엔 친구 차례였다. 친구도 나처럼 가족의 생년월일을 줄줄이 입력했다.

"그래, 맞아. 진짜 그래."


친구는 계속해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우리가 사주팔자라는 각본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끝도 없는 인생 질문은 소크라테스도 울고 갈 만큼 심오했다. 중년 아줌마 두 명의 인생 상담에 챗GPT의 영혼이 탈탈 털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질문. 부부가 말년에 취미 생활이라도 하려면 재물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물었다.

"우리 부부의 재물 궁합을 봐줘."

두근 두근 두근. AI 도사님은 또다시 1초도 안 돼 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어라? 여성의 생년월일은 분명 내 것이었는데, 남성의 생년 월일이 친구 남편으로 입력돼 있었다. 황당하고도 민망한 상황에 친구와 나는 눈물, 콧물, 아이라이너까지 번지도록 웃어댔다. 챗GPT 덕분에 졸지에 나는 친구 남편과 재물궁합을 보는, 막장 드라마 속 괴상한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거, 궁금해서 사주풀이를 끝까지 읽었다. 다행히도 결과는 시원했다. 나와 친구 남편은 재물운이 전혀 맞지 않았다. 내 남편과의 궁합이 훨씬 더 좋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점괘

챗GPT와 사주풀이를 하다 보니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 인생 첫 점괘를 보던 날, 열두 살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막내 이모와 같은 방을 썼다. 스물여덟 이모가 출근하고 나면, 이모의 책장을 들여다보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이모의 책장에는 <오싱>, <꽃들에게 희망을>, <테스>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황빛 표지의 낯선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인생십이진법>. '인생'이라는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오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첫 장을 넘겼다.

그 당시 내 꿈은 얌전한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 반 친구네 집처럼 2층 양옥집에 사는 것이었다. <인생십이진법>은 내 미래를 어떻게 그려 놓았을까. 생년월일을 품고 어렵게 페이지를 찾아냈다. 두근두근. 그러나 결과는 '에게'. 내 운명은 시골에서 정자를 짓고 사는 것이었다. 서울 한복판의 2층 양옥집은 나의 미래가 아니었다. 그 후로 시골 외가에 갈 때면 혹시 내 운명의 집이 있을까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어른이 되었다. 점집 앞만 지나가도 무서웠던 나는 결국 내 팔뚝에 난 점만 믿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복점이라 불렀다. 하지만 애 둘을 낳고, 인생이 깜깜할 때면 홀린 듯 철학관을 찾기도 했다. 이사를 고민할 때,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 아이가 아플 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종종 점을 보았다. 철학관 사장님 앞에서는 "정말 용하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걱정 말라"는 말에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문을 나서면 언제나 늘 아쉬웠다. 목은 축였으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내 인생의 설계도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관 사장님이 말한 대로 딸이 명문대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사주에 토(土)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승진한 이유도 사주에 정관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성실함과 부지런함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왜 사주를 보러 갈까? 그건 가끔은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시험 못 봤다고 징징대는 딸에게는 "너 엄청 크게 되는 사람이래"라고 숨통을 틔워 주고, 희망퇴직을 고민하는 남편에게는 "당신은 직장에서 끝까지 살아 남는다더라"라고 버티라는 응원을 건넨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믿고, 믿고 싶은 마음에 다시 믿는다.

AI 도사님은 오늘도 말한다. 내 인생 두 번째 황금기는 2029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다고. 그러면 내 나이 50대 후반이다. 오늘의 성실함이 대운으로 돌아온다니,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예고되지 않은 인생 지뢰가 갑자기 터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터지면 온몸으로 막고, 잠시 물러난다. 지뢰와 함께 불필요한 것들도 무너질 테지. 그러면 다시 일어나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것이, AI 도사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나의 운명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사주팔자 #인생 #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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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광고 홍보인. 지금은 도서관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감동적인 글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2025 경기히든작가 당선, 책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삶은 도서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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