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와와용두 회암사지 출토 청기와, 용두이다. 이 두 유물만 봐도 회암사지에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회암사지박물관)
이병철
회암사가 이렇듯 당대 으뜸 사찰이 되었던 것은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친 왕실의 후원 덕분이었다. 고려 우왕 시절, 나옹 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할 때는 물론, 조선 태조부터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그 후원은 수 대를 이었다. 특히 태상왕 이성계가 머물 정청까지 들일 정도로 회암사는 곧 궁과 다르지 않았다. 그 뒤로도 세종의 동생 효령대군의 중창과 세종의 비 정희왕후의 불사도 끊이지 않았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꽃 피웠을 불교 건축의 정수라 할 만했을 것이다.
문정왕후의 일탈적 행태는 사대부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새로운 지지 세력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특히 민중과 깊이 연결된 불교를 적극 끌어들였다. 수륙재나 무차대회 같은 불교행사를 적극 벌리는 한편, 보우 같은 승려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를 도모했다. 승과를 부활시켜 승려를 공적 지위로 격상 시키기도 했다. 도화원의 전문 화가를 동원해 그린 400점의 불화를 모시게 하는 등, 왕실 사찰 회암사지에 대한 그녀의 후원은 더욱 극진했고, 보우를 절의 주지로 머물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룬 모든 것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1565년, 계급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대중이 참가하는 불교 법회인, 무차대회를 준비하는 와중에 문정왕후가 승하한다. 이후 그녀의 집안은 몰락했고, 정난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승려 보우는 유배지 제주도에서 처형 당했다. 문정왕후가 생전에 쌓아둔 모든 것은 한낱 물거품인 양 일거에 사라져 버렸다.
회암사도 그 인과를 피할 수 없었다. 유림 세력은 조선 초부터 왕실의 후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기에 문정왕후의 파행이 더해지니, 그들의 온갖 원성이 회암사에 집중됐을 것임은 당연했다. 실제로 문정왕후 사후 1년 뒤인 1566년, 유생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했다는 기록까지 전하고 있다. 그 뒤 선조 28년, 1595년 실록기사에 '회암사 옛터'라는 표현이 있어, 그 사이 이미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유생들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왜란으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처 많은 폐사지의 돌들
차분히 느린 걸음으로 절터를 오른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했을 그 모습들은 이제 없다. 빈약한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겨우 어슴푸레 윤곽들이 잡힌다. 비어 있는 1층과 2층은 무차대회 같은 행사용이었을 것이다. 관음전 등 본격적인 건물지들은 3층부터 시작해 4, 5층을 거쳐 6층 보광전터로 한 번 집약되고 있다. 그 뒤 7, 8층의 건물군으로 다시 확산되지만, 그곳은 더욱 깊은 곳이었다. 8층에는 바로 이성계가 머물던 정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회암사지 디오라마 3층부터 본격적인 경내의 시작이다. 위쪽 우뚝 솟은 건물이 보광전이다.(회암사지박물관)
이병철
각 층을 오르며 제일 많이 보이는 것이 이른바 '정료대'다. 밤에 관솔 등을 놓아 불을 밝히는 용도의 구조물이다. 아무리 큰 절이라도 중심 건물 앞 한두 개 정도 보이는 것이 이곳엔 거의 모든 공간에 정료대가 있다.
터에 남은 주춧돌을 어림잡아 그 위의 전각들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한 채, 두 채. 정갈히 기와를 이고 있는 고운 단청의 법당과 회랑들이 내 주변을 에워싼다. 밤이라면 각 마당에서 피어오른 관솔불의 일렁임이 건물의 창과 벽에 빛과 그림자를 주었을 것이다. 하늘의 휘영청 밝은 달빛까지 어우러진다면 실로 15세기판 '루미나리에'라 해도 손색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 시각적 충격은 이미 인간 세상에 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건물의 배치는 선종불교의 규범인 '청규(淸規)'를 따랐다고 했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동쪽은 절의 온갖 살림과 사무 집행을 위한 공간으로, 서쪽은 수좌스님들의 수행과 거처로 두었다고 한다. 아마 아침 해가 일찍 드는 곳에서 부지런히 사무와 잡일을 처리하고, 해가 지는 서쪽에서 늦게까지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인 것도 같다.
8층 끝까지 오르니 남은 것은 보물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뿐이다. 불탑인지 승탑인지 이론이 많았으나, 최근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으로 확정된 듯하다. 하고 있는 모양새가 전형적인 불탑이나 승탑과 다르다. 두 가지를 섞어 놓은 듯한 구조인데, 크기도 장엄하여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기단부에 있는 기린과 용이 그려진 문양은 다른 불탑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나는 이 탑을 볼 때마다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한다. 그 누구의 탑도 아닌 이성계의 공양탑이 아닐까 하는. 큰 공력을 들이긴 했으나, 차마 기록에는 남길 수 없는 탑의 주인공. 유교를 기반으로 개창한 조선의 창건주가 불교의 상징물 속에 들어있는 것은 결코 문자화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안식처였을 회암사에 머물고자 했던 그의 바람을 효심 깊던 후손이 들어준 것은 아닐까.

▲회암사지석가모니진신사리탑 최근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그 모양이나 새겨진 문양이 무척 특이하다.
이병철
문정왕후는 세상에 상처를 남겼다. 사대부 관료 중심 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에 '비선'이 끼어들어 전횡을 일삼게 했다. 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이후 조선은 이를 온전히 극복해 내지 못했다. 상대 세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배척을 넘어 그 씨까지 말려버려야 끝나는 대립 정치가 극성을 부렸다. 그 싸움에, 임금은 만천하에 군림하지 못하고 특정 당파에 속하는 지경까지 떨어지곤 했다. 조선은 병들었고 왜란과 호란 같은 비극은 되풀이되었다.
혹자는 문정왕후나 정난정을, 시대적 한계와 사회적 차별에 도전한 적극적이고 입체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권욕과 사리에만 충실한 도전은 역사의 반동이며, 비록 일순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그 끝은 한 없는 추락과 비극 뿐이다. 그리고 문제는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엮어진 수많은 존재 또한 고통 받게 된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 데자뷔를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세상의 번잡한 속사정과 달리, 정청터 뒤 언덕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롭다. 절터 앞엔 야트막한 안산까지 있어 마치 봉황의 둥지인양 안온한 느낌이다. 속이 썩다 못해 문드러졌을 이성계도 이 풍경을 보며 잠시 하심(下心)할 수 있지 않았을까.

▲회암사지전경. 정청터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앞쪽 안산이 있어 안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병철
수많은 역사의 격랑을 겪은 이곳도 이젠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추진 중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폐허로 남은 이곳에도 새로운 희망과 미래가 싹틀 것이다. 아니,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이곳은 새로운 희망으로 넘친다. 무더운 날씨에도 휴일을 맞아 이곳을 찾는 저 가족들과 그 아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다.

▲회암사지 전경 2 층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여기부터 박석이 깔려있고, 그 길은 보광전까지 이어진다.
이병철
폐사지의 돌들은 멀리 보면 건재한 것 같아도 가까이서 보면 많은 상처가 남아 있다. 그 상처를 지니고도 수백 년을 견뎌온 돌들이 더는 상처 입지 않길 마음 깊이 기원해 본다.
짙은 녹색 일변도던 길가 풀 숲 사이로 갈색빛이 조금씩 비치고 있다. 치열했던 여름이 전쟁을 치른 흔적들이다. 더위는 아직도 맹렬하나, 어느덧 자연은 가을을 준비하는 것 같다. 수억 년을 그리 해왔던 것처럼. 나도 슬슬 가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역사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작은 내 삶들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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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국내여행을 다니는 중년의 직장인입니다. 글로써 세상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우며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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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정치 끝장판, 망한 절터에서 느낀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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