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13일 매일신보에 소개된 선옥상점과 그 주인 부산유선(이유선)에 관한 기사 부산유선(이유선)을 부내면 구산리에서 진영학원(進英學院)을 설립하였으며, 소년 구장으로 면협의원 등 여러 중요 공직을 맡아 활동하고, 3년전인 1940년 소사에 와서 상점을 운영하여 거장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선옥상점(善屋商店)
부산유선(富山裕善)씨
부천군의 상업은 국지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엿다. 소사역전 선옥은 군내 단연 1위의 거상점이니 복장잡화와 포목 등속 문방구 지물류(종이류) 신발류 등 풍부히 구비하야 대도시 상점에 비하야도 손색이 없다. 주인 부산유선씨는 본군 출생으로 고향인 부내면 구산리에서 무산아동을 위하야 진영학원(進英學院)을 설립하얏으며 소년 구장으로 면협의원 기타 중요 공직을 역행하엿스며 생활에 절제와 근검을 역행하야 치산수분하다가 약 3년전 소사에 와서 소사상계의 거장이요 40세의 전도다망한 청년이다. 천성이 인후하고 지략이 출중하며, 상덕이 겸전하야 이 세계에 신의를 두텁게 얻었으니 금일의 성공은 당연한 일이다. 씨는 현재 부천군복장잡화소매상조합 이사장이요, 새로이 창립을 본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조합 이사장으로 추천되엿다(사진은 선옥상점)
1943년 1월 기준으로 3년 전인 1940년에 소사(素砂)에 와서 상점을 차려 거상이 되었으며, 그 전에는 구산리 고향에 진영학원을 설립해 교육에 매진하였고, 소년 구장과 면협의원 등의 공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유선은 실제로 1943년에 소사읍회의원이 되었으며, 1944년 1월에 설립된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업조합> 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즉, 1940년 이전에는 진영학원을 운영하였고, 그 이후에는 '선옥'이라는 상점을 차려 지역의 유지가 되었으며, 1943년에는 소사읍회의원 그리고 1944년에는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조합 이사(조선총독부관보)가 되었다.
특히 선옥 대표로서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광고를 하였다. 1941년 1월 1일자 조선신문의 <해국일본만세>와 1942년 1월 6일 조선신문의 <격멸미영 웅비 일본의 신춘>이 대표적이다.

▲1943년 5월 30일 경성일보 기사 부산유선(이유선)은 1943년에 소사읍회의원으로 이 당선되어 마장충태랑(馬場忠太郞), 부곡평치(富谷平治), 이주용(李宙鏞), 김택양충(金澤良忠-金孝泰), 고산병희(高山炳熙), 고전태작(高田太作), 등산홍덕(藤山弘德), 소견산청삼랑(小見山淸三郞), 조창일부(朝倉一夫), 청수항사(淸水恒司), 원촌상일(元村常一) 등과 함께 당선어례 광고를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성서조선사건과 이유선의 관계
무엇보다 '성서조선' 사건 기록에서 이유선의 이름은 찾기 어렵다. 아마도 핵심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측해보면 이유선이 핵심인물이 아니라 구독자로서 경찰조사 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일제 경찰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200, 300명에 이르는 <성서조선> 구독자들을 사상범으로 간주하고 압수수색과 장기간의 구금을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유선에 대한 부천시의 기록이 국사편찬위원회가 많이 다르고, 이유선이 부천에서 활동했던 내용도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부천시는 이유선에 대한 행적을 다시 연구하여 부천시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유하기
부천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이유선, 실제 행적은 달랐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