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딧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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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중식이 밴드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의 마음을 닮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누구나 자신을 별이라 믿는다. 하지만 진로 앞에 서면, 별빛이라 여겼던 스스로가 어쩌면 작은 반딧불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내 전자결재함에 인문계 전학 신청서가 몇 장씩 올라온다. 어떤 아이는 스스로 택한 길에서 적성을 찾지 못해 방향을 바꾼다. 아쉽지만 응원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또 어떤 아이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원치 않는 전공에 들어와 힘들어한다.
"엄마가 억지로 보냈으니 건드리지 말라"던 아이의 외침에 담당 교사도 무너졌다.
물론 모든 길이 후회로 끝나진 않는다. 부모의 권유로 시작했다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하고, 스스로 택한 길이라도 현실 앞에서 주저앉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선택했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만들어가느냐이다.
아이들은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인문계에서 직업계로, 직업계에서 인문계로 옮겨가는 건 해마다 반복된다. 열다섯 살 아이가 자기 적성과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 교직 33년 차인 나도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불혹이나 지천명 같은 말은 사실 언어도단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걸 일찍 결정하라고 요구하는 건 가혹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흔들어 놓지만, 모든 길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깊은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자리도 있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하는 직업도 많아진다. 그렇기에 "대학이 답이다" 혹은 "직업계고가 답이다" 같은 단순한 도식으로는 아이들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부모의 조언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명령이 되는 순간 아이의 마음은 닫힌다. 밥상머리에서 "나 때는 말이야" 하고 툭 던지는 이야기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아이가 보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는 태도다.
내가 본 아이들 중 잘 적응한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선택했다"는 자부심보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지겠다"는 태도였다. 부모의 권유로 시작했더라도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면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아이들의 진로는 항해와 같다. 아이는 키를 잡은 항해사, 부모와 교사는 옆에서 바람의 방향과 파도의 높이를 알려주는 선배 항해사다. 대신 키를 잡아줄 수는 없다. 완벽한 항로는 없다. 하지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책임지는 항로는 있다.
아이들의 선택이 흔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우리도 여전히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가. 중요한 건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흔들릴 때 옆에서 지켜봐 주는 시선이다. 별빛이든 반딧불이든, 그들의 항해에 동행하는 것. 함께 있을 때 그 길은 더 따뜻하게 빛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떤 길을 택하든, 흔들리면서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주는 것. 그것이 내가 교장으로서 붙들고 싶은 가장 큰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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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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