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 그리기 가운데 채본, 양옆에는 내가 그린 그림
정현순
나도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스케치북과 연필만 있으면 쓱쓱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캐리커처를 배우고 있지만 그림 배우기에 대한 역사가 조금은 길다. 50대 중반에 처음 유화를 배우기 시작되었다. 중간중간 잠시 쉬다가도 또 배우기를 반복해왔다.
그러다 50대 후반에는 그림 공부하는 친구들과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가족, 형제, 조카들에게 경사로운 일이 있으면 미숙한 그림이지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잘 그린 그림도 아닌데,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만 앞서 용감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60대 중반까지 유화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70대를 앞둔 어느 날 그동안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서 이젠 더는 유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려놓은 그림이 50점은 넘었던 것 같다. 몇 점은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을 하기도 했다. 유화를 그만둔 이유는 유화는 보편적으로 1호 기준으로 가로 26cm,세로 18cm 4호는 가로53cm 세로 40cm 등이다. 나는 주로 4호 캔버스가 많고 그 이상도 몇 개가 있다.
캔버스의 크기가 다양하기에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 또 이젤, 그림물감, 등 준비물도 적지 않은 편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서 내가 무슨 유명한 화가도 아닌데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이 처리하기 곤란할 거란 생각이 제일 컸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그림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그림을 그만두긴 했는데 어딘가 허전했다.
유튜브에서 연필스케치를 몇 달 따라 해 봤지만 한계가 있었다. 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참에 작년 겨울에 우연히 이웃을 만났다. 평생학습원에서 캐리커처를 배우고 온다는 말에 나도 배우고 싶다고 하니 그가 그럼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한다.
생각만 해도 재미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준비물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주었다. 스케치북, 연습장, 연필, 지우개, 붓펜 등을 바로 준비하고 다음 시간에 그와 함께 갔다. 처음 간 강의실이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다. 준비물은 유화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간단하다. 보통 주부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크기의 에코 가방에도 꽉 차지 않는다.
첫 시간엔 붓펜으로 줄긋기부터 배우고 다음 시간에는 눈, 코, 입, 귀 등을 배웠다. 어려웠지만 재미있는 시간이다. 남아, 여아 옷, 어른 옷 등 차례로 배웠다. 그런 후 여자 어린이, 남자 어린이 모습을 그렸다. 얼마 전부터는 어른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아동의 모습보다는 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이다.
강사의 도움으로 과정을 즐겁게 하고 있다. 강사가 준 채본과 비슷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만족감과 힐링이 되기도 한다. 채본과 많이 비슷해지면 앉아서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혼자 손뼉을 치며 '와우' 하며 절로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곤 오며 가며 그림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물론 학창 시절 해보지 못한 것을 도전해보는 즐거움도 있다. 그중에는 노년에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면 공허함을 줄이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이다. 지내보니 노년의 하루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도 바쁜 이유가 한 가지도 없다. 등교할 아이들도 없고 남편도 퇴직한지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차 한잔 마시고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집안일 대충한다. 오전 시간이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간다. 만약 오후에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시간은 한없이 지루하고 지겹게 지날 것이다.

▲청소년 그리기 처음으로 그린 청소년
정현순
내가 40대 후반에 뒤늦게 배운 피아노도 나만의 보물상자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는 내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아이들은 어느새 40대 아들과 50대 딸이 되었다. 그 나이 때는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아이들에게 언제 연락 올까? 언제 오려나? 내가 가봐야 하나? 하는 등 섭섭한 것만 손꼽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나만의 보물상자에는 어느새 보물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글쓰기, 일주일에 세 번 수영, 캐리커처 그리기, 피아노 치기, 산책, 화초 가꾸기, 친구들과 밥 먹고 수다 떨기, 가끔 여행 등이다. 그 외에 연필 깎기, 지우개로 지우기, 문구점 구경 가기 등의 즐거움은 덤이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놀러 온 아들이 내가 그린 여러 모습의 캐리커처를 보더니 "엄마 앞으로 손자 모습 하나 그려주세요. 액자 해놓게요" 한다. 아들이 해준 응원의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알겠어. 엄마가 열심히 배워서 그렇게 할게"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주문 1호인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 거실에 앉아 평화로운 하늘을 그리고 나무, 새들 등을 그리는 그 날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앞으로 나의 보물상자에는 어떤 것들이 더 채워질지 기대된다.
은퇴 전후의 6070 시니어들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노년의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지루해, 그래서 벌인 일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