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온실 기지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초록색 생명체이다
오영식
남극에서만 세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는 조리 대원(이희영)의 요리 실력은 한국에서도, 남극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 해도 재료가 부족하면 솜씨를 발휘하기 어렵다. 지금 기지에 남아 있는 식재료는 쌀 같은 건조 식품과 삼겹살, 닭고기 같은 냉동 식품,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라면과 통조림 같은 공산 식품 정도다.
그마저도 연말까지 18명의 대원이 나눠 먹기에는 양이 넉넉지 않다. 그래서 기지 총무(황의현)는 매주 '대원들의 불만'과 '식품 재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쉽지 않은 역할을 맡고 있다.
남극기지는 각자 맡은 분야가 엄격히 구분돼 있어 다른 대원의 업무를 도와줄지언정 침범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누군가 오늘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해서 창고에서 마음대로 꺼낼 수 없고, 생선을 싫어한다고 해서 생선 요리를 줄여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9개월 가까운 월동 생활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서로의 기호식품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대원은 짜장면이 메뉴로 나오는 날이면, 전날 야근을 하고 아침부터 자고 있다가도 몇 시간 만에 다시 일어나 점심 식사 자리에 빠지지 않는다.
심리적 자원, 음식의 힘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결핍된 남극이지만 다행히 기지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 영상 통화를 시도할 수 있는 날은 손에 꼽는다. 한국에서라면 손쉽게 볼 수 있는 유튜브도 이곳에서는 해상도를 최저로 낮춰야 겨우 재생된다. 여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활동도 많지 않다. 노래방 시설, 게임기, 당구대가 마련돼 있지만, 금세 싫증이 나 겨울철이 되면 이용이 뜸해진다. 결국 대원들은 하나둘 방으로 들어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조디악에 탄 대원들 칠레 쇄빙선으로 들어온 신선식품을 가지러 가는 길
오영식
이런 고립된 생활이기에 음식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면과 춘장은 있지만 양파가 없어 짜장면을 만들 수 없다는 소식, 냉동 닭고기는 있지만 양배추와 고구마가 없어 닭갈비를 요리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대원들은 "채소가 없어도 좋으니 만들어 달라"고 조리 대원을 보챈다.
요리에 문외한인 대원들의 눈에는 채소가 빠진 요리라도 그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리에 자부심을 가진 조리 대원에게는 그 요구가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결국 대원들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이내 포기하고, 재료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휴가도, 외박도, 외출도 없는 남극 기지에서는 끼니마다 조리 대원이 준비하는 메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잔치국수가 간절한 대원은, 그 메뉴가 식단에 오르기를 하염 없이 기다린다. 재료가 부족한 것도 이유지만, 서로 취향이 다양하기에 특정인만을 위해 요리 순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칠레 쇄빙선 이 배를 통해 채소를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오영식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마침내 몇 주 만에 원하는 음식을 맛보게 된 순간의 표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어린아이가 오래도록 갖고 싶던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얼굴이 환해지고, 그 기쁨은 곁에 있던 다른 대원들에게도 전염된다. 한 사람의 행복이 모두의 분위기를 밝게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든 살 수 있는 달걀과 채소 한 줌이, 이곳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지탱하는 심리적 자원이 된다. 나는 남극에 와서야, 음식이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사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잔치국수 두 달여 만에 신선한 계란이 들어간 요리와 과일을 먹었다
오영식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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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기과학 연구원,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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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없어도 괜찮은데... 닭갈비 주문 퇴짜 맞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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