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시 낭송하는 김남주 시인
연합뉴스
하이네·브레히트·아라공·마야코프스키·네루다를 좋아하고, 네루다와 브레히트의 시를 원서로 읽겠다면서 감옥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시인.
이 땅의 노동자의 쉬는 날을 위하여 외아들의 이름을 김토일(金土日)이라고 지은 노동해방의 전사.
'사과꽃'과 '해운대 엘레지'를 애창곡으로 불렀던 순결한 시인.
아버지는 일자무식의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한쪽 눈이 먼 장애인, 농꾼의 아들로 태어나 서민들과 함께 산 서민의 시인.
햇수로 9년 3개월, 달수로 111개월, 날수로 3,541일을 0.75평 감옥에서 보내고
500편 가까운 시 중에 350편 정도를 감옥에서 쓴 사내.
그나마 지필묵이 허용되지 않아 우유곽 위에, 담배싸는 은박지에 한 자 한 자
피를 찍어 써야했던 중세의 이단자, 김남주 시인.
김남주 열사는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머슴살이집 딸이었다. 어머니는 한쪽 눈이 멀어 출가가 어렵게 되자 아버지가 머슴 김봉수와 짝지어 주었다.
김남주의 아버지는 옹골차고 부지런하여 땅을 사서 자립하고 가정을 꾸렸다. 김남주는 1954년 삼산초등학교에 들어가 6년 동안 우등상을 받고, 해남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에 졸업했다. 광주고등학교에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1년 재수 끝에 광주일고에 합격했다.
김남주가 광주일고에 진학할 시기인 1964년은 박정희가 당초의 공약을 저버리고 민정에 참여하여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추진하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야당, 재야, 학생들이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1학년이던 그는 광주일고도 시위에 동참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방학 후부터 학교엘 나가지 않았다.
조숙하고 시대정신이 강했던 김남주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였던 광주일고 후배 학생들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아울러 획일적인 입시위주의 교육에 반발하여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리고 24세 때인 1969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늦깍이 대학생이 되었다.
김남주는 전남대 1학년 때부터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꿈 많고 정서적이었던 영문학도를 반정부, 저항운동의 리더로 만든 것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야망과 그가 조성한 시대의 폭압성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쿠데타는 대학생 김남주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친구 이강과 함께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김남주와 이강이 주도한 유신선포 이후 전남대의 첫 '봉기'는,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전봉준이 맨손으로 궐기하면서 사발통문을 통해 농민들을 동원했둣이, 두 대학생은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하여 학생들을 궐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하다가 1년여 만인 1973년 연말에 석방되었다.
<함성>지 사건으로 학교에서도 제적된 김남주는 고향으로 내려와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 비평>에 투고하여 1974년 여름호에 실렸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 광주 5?18망월묘역(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는 김남주의 묘. 김남주는 교도소에 갇혀서도 신군부의 학살을 꿰뚫어본 시를 남기며 ‘혁명시인’으로 불린다.
이돈삼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시를 위한 시인이 아닌 투사로서의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유신체제를 타도하는 전사가 되고자 했다.
김남주 열사는 1975년 생계수단으로 광주에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개설했다. 그러나 시인과 '사업'은 어울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다. 서점은 동지들의 모임장소 역할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김남주 열사는 본격적인 민족해방과 유신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남민전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79년 12월에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옥중에서 같은 조직원이었던 박광숙 씨의 구애를 받고, 10년 후 출옥하여 결혼했다. 10년 동안 감옥에서 많은 저항시를 썼고, 박광숙 씨의 따뜻한 옥바라지와 사랑을 받으면서 장기수의 고통을 견뎌냈다.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국내외 문인들의 석방운동이 전개되어 1988년 연말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항시를 쓰고 강연을 하면서 노태우 정권과 맞섰다. 그리고 진보적인 문인 단체와 '문학기행'을 다녔다.
박광숙 씨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한때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민주화의 분위기를 타고 여기저기서 강연을 초청하고, 시와 시론, 번역에 손대고 무엇보다 장기간 복역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망가져, 흰눈이 쏟아지던 1994년 2월 13일 새벽 49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영결식은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씨의 추념사의 한 부분이다.
그는 끝내 어떤 타협주의나 거짓된 해답에 기울지 않았다. 그의 생애도 문학도 미완의 것으로 남긴 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미완성에 의해 그가 최대의 진정함을 쟁취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그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이유다.
고 목
김 남 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 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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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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