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당시 국내에서는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학공부와 선교 활동에 열중하였다. 기독교 신·구교 공동 번역 책임위원을 지내고, 1968년부터 8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구약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시(詩)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한다. 이것이 시인이 되는 계기였다. 1973년에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간행했다.
문익환의 생애가 평범한 삶에서 비범한 생으로 바뀐 것은 1975년 8월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발행하던 친구 장준하가 유신 치하에서 의문사를 당한 것을 지켜보면서였다. 장준하는 군사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다 '실족사'를 가장, 암살되었다. 이제부터는 장준하의 못다한 몫까지 대변하겠다는 신념에서, 57세라는 늦깎이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학문적 역량과 사심이 없는 신앙심,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그를 민중의 벗이 되고 지도자로 떠받들리게 한 것이다. 그에게는 권력이나 명예 등은 안중에 없었다. 그리고 독재정권이 펴놓은 긴급조치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문익환은 1975년 8월 안병무·서남동·이문영·문동환·이우정 등 박정희 정권에서 쫒겨난 해직교수들과 함께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갈릴리교회를 설립한다. 이 모임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전원이 구속되었다. 불의의 시대에 정의의 길에 나섰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과 강압통치를 비판하면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기초하여 윤보선·김대중·함석헌·정일형·이태영·문동환·함세웅·문정현 등과 함께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선포한다. 그리고 모두 긴급조치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3·1 명동사건'으로 그의 첫 번째 구속사건이 된다.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과 함께 주모자로 몰려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정에서 그는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25일 간의 옥중단식을 결행했다. 1977년 11월 말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22개월의 '제1차 옥고'를 치렀다.
석방이 되었다고 곧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출옥한 후에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78년 10월 13일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하다 형집행정지가 취소되고 재수감되었다. '제2차 옥고'는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13개월 만에 풀려났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민주주의가 바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데 이어 1980년 5월 17일 다시 쿠테타를 일으켰다. 문익환은 김대중·함석헌·이문영 등 26명과 함께 이른바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과 노조의 소요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23일 동안 단식하면서 옥중투쟁을 전개한다. '제3차 옥고'는 27개월 만인 82년 12월에 끝이 났다.
석방된 그는 1983년 1월 갈릴리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이 교회는 탄압받는 학생·노동자들과 민주인사들의 공부방이고 집회장소가 되었다. 이즈음 정국은 더욱 뜨거워졌다.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이 연대하여 반 전두환 투쟁을 벌이고, 5공정권은 심하게 탄압했다.
1984년 10월 19일 재야 민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한다. 국민회의는 국민 각계의 민주민권운동을 대표하고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강력한 선전활동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반민중정책을 비판하고자 결성되었다. 문익환은 의장으로 선출되어 국민회의를 이끌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정은 더욱 가중되었다. 민주화세력의 저항도 그만큼 거세졌다. 문익환은 반독재 투쟁의 맨 앞에 서서 강연을 하거나 시위를 하면서, 그리고 압제자들이 선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회를 열었다. 80년대 중반기 크고 작은 재야인사들의 시위에 그는 빠지지 않고 앞장섰다.
그는 한복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독재권력과 치열하게 싸웠다. 무고한 젊은 전경들에게는 늘 따뜻한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85년에는 서울의 각급 대학과 노동현장을 비롯 지방 대학의 초청을 받고 순회강연을 다녔다. 서울대와 대구 계명대의 순회연설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수배되었다. 그를 초청한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고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학생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1985년 5월 20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나, 그는 단호히 재판을 거부한다. 독재정권의 정의롭지 못한 사법부의 재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1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제4차 투옥'은 87년 7월 8일 출옥할 때까지 26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 마침내 '6월항쟁'이 일어났다. 옥중에서 6월항쟁의 소식을 들으며 하나님과 민주국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6월항쟁으로 전두환은 물러났지만 후계자 노태우가 부정선거와 야권의 난립에 힘입어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문익환은 88년 1월 노태우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단식을 시작하고,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한 책임을 지고 '민통련' 의장직을 사임한다. '민통련'은 민주통일운동연합의 약칭으로, 85년에 조직된 재야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단체였다. 정치인들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민통련'은 6월항쟁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으로 실시된 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야권의 두 김씨 (김대중·김영삼)의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이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어 군정이 연장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민통련' 의장을 사임한 것이다. 하지만 재야민주인사들은 88년 6월 그를 다시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재야에서 그의 비중과 위상은 따를 사람이 흔치 않았던 까닭이다.
문익환은 89년 3월 25일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고문이었다.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나 평화통일 문제를 협의하는 등 활동을 마치고 귀환하자 정부는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 혐의로 구속했다.
이 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90년 10월 20일 형 집행정지로 19개월 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5차 투옥'에서 석방된 후 한 작가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통일관을 말한다.
"내가 바라는 통일이란 어느 한 쪽이 이기고 어느 한 쪽이 지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야.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 모두에게 이로운 길을 찾아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그것을 실천해 보려고 방북한거야."
석방될 때 그의 나이 어느덧 73세가 되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는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용암처럼 분출하고 있었다. 육신은 노쇄해도 마음은 항상 청춘이었다.
91년 1월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그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 해 5월 18일 '5.18 광주민중항쟁 유족회'가 주는 '5월 시민상'을 수상했다.
노태우 정권은 일부 야당을 끌어들여 3당 야합으로 다시 원내 과반수를 장악하면서 독재권력의 횡포를 자행했다.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 열사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구타당하여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문익환은 강경대 장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진상규명운동을 벌이다가 6월 6일 재수감되었다. 정부가 형집행정지를 취소한 것이, '제6차 투옥'이었다.
문익환 열사는 93년 3월 6일 형집행정지로 21개월 만에 출옥한다. 76세의 노령도, 거듭되는 투옥도 그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출옥한 그는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고, 제4차 범민족대회 서울대회의 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불굴의 신념과 열정으로 뒤늦게 뛰어든 재야의 황량한 길거리에서 민주주의와 통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던 그는 거듭된 옥고로 심신이 많이 쇠약해졌다. 결국 1994년 1월 18일 저녁 자택에서 졸도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회복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 파란 많은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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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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