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09.15 14:05수정 2025.09.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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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핸드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한다. 지하철도 타고, 돈도 보내고, 심지어 용돈까지 충전한다. 나는 아직도 남편 명의 카드를 빌려 쓰는데 말이다. 청소년 둘을 키우는 엄마인 내게 디지털 세상은 여전히 낯설다.
아주 오랜만에 둘째와 둘이 브런치 먹으러 나간 날이었다. 6학년 아들은 OO뱅크 계좌와 교통카드를 갖고 있다. 버스에 탄 아이는 핸드폰으로 교통카드 잔액을 확인하더니 충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하철역에서 내가 채워주겠노라 했더니 아이 얼굴에 물음표가 뜬다.
"충전하러 왜 지하철 역까지 가요? 엄마가 지난주에 준 5만 원으로 할 거예요."
그러더니 핸드폰 뒤에 카드를 댔다. 5초 만에 잔액 2930원이 5만2930원으로 바뀌었다. 내가 뭘 잘못 본 건줄 알았다. "폰으로 카드 충전을 해?"라고 물으니 아이는 짧게 "네"라고 대답하더니 친구 메시지를 보며 혼자 씩 웃는다.
답장 보내는 손이 바쁘다. 카드 충전을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미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능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며 문득 시간의 속도가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는 나보다 앞서가고 있었다.
아이 발이 내 손바닥보다 작을 때가 있었다. 그 발로 도도도 달려와서 폭 안기면 내 명치에 파고드는 동그랗고 단단한 머리가 뻐근해서 귀엽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어릴 때, 엄마가 퇴근하면 졸졸 쫓아다니며 그날 있던 일을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정말?" 등의 추임새를 엄마가 넣어주면 나는 더 신나서 떠들었다. 얼마전 엄마는 그렇게 떠들던 애가 요샌 묻는 말만 대답하니 가끔은 쓸쓸하다 했다. 나는 '30년 전 일로 별 게 다 쓸쓸하네. 현재를 살아야지'라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
아이 옆에서 '핸드폰 교통카드 충전'이라고 검색해서 대충 그게 뭔지 알아냈다. 알았으면 됐지, 하는 마음과 아들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혼재했다. 엄마에게 했던 입바른 소리가 세월을 타고 훈계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엄마네 집에 갔던 어느 날, 핸드폰으로 다운 받은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엄마는 이마트를 갈지, 코스트코를 갈지 내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도착 시간과 매장 세일 정보를 각각 캡쳐해서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가 "내 말 듣고 있어?"라고 소리 높이길래 "이미지 보냈잖아!"라고 더 크게 대답했다. 엄마가 혼잣말 하는 거 같아서 얼른 이어폰을 꼈다. 엄마의 궁금증을 '정확하게' 해결했고 소설은 한참 재미있어지는 찰나였으니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은 매우 합당했다.
카드 충전을 더 물어보지 못한 나와 마트 이야기를 더 잇지 못한 엄마가 이렇게 만난다. 내 미래에 당도할 슬픔을 미리 체험한다. 아들이 친구 메시지에 보내는 그 환한 미소를,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을까. 엄마가 원했던 건 마트 결정이 아니라 딸과 나누고 싶은 소소한 대화였겠다.
손바닥보다 작던 발이 이제는 나보다 큰 신발을 신고, 그 작고 동그란 머리는 내가 올려다봐야 할 높이에 있다. 시간은 아이를 앞으로 데려가면서 나를 뒤로 데려간다. 쓸쓸함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묘한 평온함이었다. 아이가 나보다 앞서가는 것, 내가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부모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네이티브이고, 우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온 이주민이다. 세대 간 기술 격차는 단순히 사용법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우리가 말로 설명해달라고 하는 순간, 아이들은 이미 검색을 마치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
사랑하는 이를 키워내고, 그가 나보다 앞서 가는 걸 지켜보며, 조금씩 뒤처지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 그게 사랑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했던 입바른 소리를 이제야 거둬들인다. "현재를 살아야지"라고 했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현재를 사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따라갈 것이다. 노이즈캔슬링으로 차단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들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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