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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녹슨 지붕과 아파트 숲, 범일동 골목의 두 얼굴

범일동의 지붕이 증언하는 불평등의 역사

등록 2025.09.08 10:26수정 2025.09.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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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에 닳아 벗겨진 지붕, 그러나 그 위로 널린 빨래는 살아 있는 삶의 색채를 더한다. 뒤편의 달동네 풍경은 도시가 가진 기억과 현실의 층위를 동시에 보여준다.
세월에 닳아 벗겨진 지붕, 그러나 그 위로 널린 빨래는 살아 있는 삶의 색채를 더한다. 뒤편의 달동네 풍경은 도시가 가진 기억과 현실의 층위를 동시에 보여준다. 정남준

부산 동구 범일동의 골목을 오르다 보면, 도시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낡고 갈라진 지붕 위로 녹과 이끼가 뒤엉켜 흐르고, 햇볕을 받아 반짝이기보다는 무겁게 쌓인 세월의 무게를 드러낸다. 벽돌담 위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가 걸려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하루를 살고, 빨래를 널고, 숨을 고른다. 그러나 골목 뒤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능선처럼 솟아올라 오래된 삶의 공간을 압도한다.

범일동 골목은 부산이 겪어온 산업화와 도시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조선소 노동자, 시장 상인, 이주민들이 함께 터전을 꾸리며 살아온 이 골목은, 도시의 성장 이면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생존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골목은 "재개발 대상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철거와 이주의 압박 속에 놓여 있다.

 낡은 집 앞,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닿은 꽃들이 피어 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벽처럼 들어서며, 오래된 마을의 삶과 기억을 압도한다. 범일동 골목이 보여주는 건 도시가 품은 불평등한 풍경이다.
낡은 집 앞,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닿은 꽃들이 피어 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벽처럼 들어서며, 오래된 마을의 삶과 기억을 압도한다. 범일동 골목이 보여주는 건 도시가 품은 불평등한 풍경이다. 정남준

재개발은 늘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과 공동체의 기억은 무참히 잘려나간다. 오래된 지붕의 균열과 녹은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이 버텨온 시간의 흔적이다. 그러나 자본과 정책의 논리는 이 흔적을 "낡음"으로 규정하고, 지워내는 것을 발전이라 부른다.

골목은 아직 살아 있다. 옥상에서 펄럭이는 빨래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빨래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숲은 이 삶의 공간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현실을 예고한다. 재개발은 삶을 더 낫게 만들기보다, 삶을 밀어내고 있다.

 좁은 골목과 낮은 지붕들이 이어진 마을 뒤로 초고층 아파트가 장벽처럼 서 있다. 한 도시의 주거 양극화와 재개발의 현실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풍경이다.
좁은 골목과 낮은 지붕들이 이어진 마을 뒤로 초고층 아파트가 장벽처럼 서 있다. 한 도시의 주거 양극화와 재개발의 현실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풍경이다. 정남준

범일동 골목의 풍경은 묵묵히 말한다. 도시 발전의 속도는 빠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삶과 기억은 너무 쉽게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한 개발을 하고 있으며, 누구의 삶을 대가로 삼고 있는가.

낡은 지붕 위의 녹슨 흔적은 질문이자 증언이다. 그것은 이곳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삶의 터전임을, 그리고 개발의 언어가 지우려 하는 기억의 무게를 고발하고 있다. 범일동의 골목은 사라져가는 낡은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오래된 주택과 상가, 그 뒤로 겹겹이 솟아오른 신축 아파트 단지가 대비를 이룬다. 개발과 재개발의 흐름 속에서,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교차하는 현장이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오래된 주택과 상가, 그 뒤로 겹겹이 솟아오른 신축 아파트 단지가 대비를 이룬다. 개발과 재개발의 흐름 속에서,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교차하는 현장이다. 정남준
#범일동 #골목사진 #재개발 #달동네 #비주류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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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드러나지 않은 삶과 소외된 이들의 희망을 세상에 전하고자 합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그 긴 여정에 함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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