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민족대회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는 한청협 의장 이범영과 유기홍 민청련 의장
민청련동지회
이번에는 징역을 오래 살지는 않았고, 5개월 만인 9월에 출소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무서운 기세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범영은 서서히 예전에 느끼지 못하던 피로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어느날 집에 들른 이범영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란다. 얼굴에 검은 기운이 돌고 눈동자에 노란 황달 기운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급히 세브란스 병원을 예약하고 입원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범영은 듣지 않고 봉원사 뒤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을 시작했다. 조금 쉬면 나을 것이라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병세를 악화시켰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경희의료원에 입원했을 때는 얼굴색이 노랗다 못해 검은빛마저 돌았다.
이범영은 1993년 3월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담도암이었다. 수배 상태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전국을 돌며 청년단체들을 묶어 세우는 무리한 강행군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마음의 갈등도 그의 정신력과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3년 6월, 입원한 지 3개월 만에 이범영은 위와 췌장 3분의 1, 담낭 전체를 떼어 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10일 만에 퇴원한 이범영은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서너 달이 지나자 살도 붙고, 산책도 다니고, 독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기공수련도 열심히 했다.
93년 말 겨울을 고향 원주에서 보내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청년단체 후배들과도 많이 만나고 담소를 나눴다. 겨울방학이 되어 경기도 양평에서 엄마와 따로 살고 있던 건혜와 승민 두 딸이 놀러왔다. 이범영은 딸들과 '왕과 신하' 놀이 연극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집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완쾌하여 활동을 다시 시작할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때였다.
94년 정초에는 문익환 목사께 세배도 갔다. 그러나 봄부터 병세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장상환 교수 소개로 산청에 요양을 갔다. 조금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여 20여 일 만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올라온 지 얼마 안 돼 1994년 6월 장폐쇄 증세가 있어 경희의료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병세는 급속히 악화돼 병원 측으로부터 치료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범영은 국립의료원으로 옮겨 마지막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암세포가 폐까지 전이됐다. 의식이 있을 때 민청련 선배 김희택의 부인 조명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삶이 허망하다고 몇 번이나 되뇌이면서 부모님을 두고 떠나 죄스럽다며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창조주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40년 동안 살았는데 하느님께서 데려가신다면 가야지 어찌 하겠소. 대우주 속에 나는 모래알만도 못한데..."
결국 그는 산소호흡기를 입에 문 지 20여일 만에 친구와 선후배들, 가족들의 간곡한 기원을 외면한 채, 어머니의 통곡도 뒤로 한 채 그렇게도 극진히 사랑하는 한반도를 두고 떠났다. 1994년 8월 12일이었다.
불꽃 같은 삶과 죽음
그는 그보다 조금 앞서 세상을 떠난 김병곤에 대해서 사후에 그를 몹시 흠모하여 <우리의 영원한 청년투사 김병곤 동지>라는 김병곤 평전을 썼다. 이 글 말미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년 동지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천수를 누리거나 난치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죽음은 여기서 논외로 한다. 우리는 투쟁하다가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 그것은 고귀한 희생이며 영예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투사 김병곤 동지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김병곤이 바로 그가 고등학교 학생 때 꿈꿨던 '신념대로 살다가 무엇 아쉬움 없이 죽는' 사람이라고 보았고, 자신 역시 그렇게 죽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그는 민주화운동에 모든 걸 불사르고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그가 생전에 존경했던 문익환 목사, 김근태, 김병곤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경기도 모란공원에 안장된 이범영 묘소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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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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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삶을 온전히 바친 '직업적 운동가' 이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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