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단체 시가도 해방 직후 청주의 우익단체 시가도
박만순
1946년 10월 9일, 이범석 주도로 결성된 족청은 미군정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다. 족청은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을 제시하며 중도 노선을 표방했고, 지도자 양성사업에 주력했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던 탓에, 족청은 다른 우익 청년단체들과 갈등을 자주 빚었다. 또한 대공투쟁을 외면한 족청에 좌익세력들이 은신처로 숨어들면서 빨갱이 집단 또는 기회주의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족청 충북도단부는 1947년 4월 12일 이범석의 참석 하에 결성되었으며, 이후 청주·청원·진천·영동·보은 등 6곳에 군 단부가 설치되었다. 도단부 단장은 허광, 청주시단부 단장은 곽창수가 맡았다.
족청은 산하에 훈련부를 두고 중앙과 지역에 훈련소를 설치했다. 중앙공원 내 훈련소를 포함한 충북 지역 6개 훈련소의 수료생은 1948년 기준으로 6485명이었다. 같은 해 10월 9일 기준, 전국 족청 단원 수는 115만 4021명이었으며, 이 중 충북 단원 수는 8만 8384명이었다(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 1989).
하지만 청주 족청은 정치 세력화에 실패했다. 청주·청원에서는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청주 족청에 명망 있는 지도자가 부재했고, 대청과의 갈등으로 조직이 급속히 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3.8선 이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정치적 청년 결사체 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1947년 5월에는 충북지부가 조직되었고, 위원장에는 나성준·이원형, 도본부 파견대표에는 전희벽·이종익, 청주지부 파견대표에는 김백림·김광빈이 임명되었다. 서청은 조직 결성 직후부터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 활동에 집중했다.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1947년 서청 충북도 파견대표 전희벽은 민영복 독립촉성국민회장과 함께 대전본부를 찾았다. 이들은 "청주가 공산당 천하여서 우익단체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임일 대표가 와서 반공 강연을 해 주십시오. 또한 국민일보에 이북의 진상을 기고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탈옥수의 고백'이라는 공연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임일의 청주강연이 확정되자 청주 시내는 서청과 좌익의 삐라 공방이 전개되었다.
서청 회원 20명은 1947년 5월 9일 충북 민주주의민족전선 건물을 습격해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유리창을 깨뜨렸다. 사무실에 있던 민전 회원을 테러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악명을 떨친 서청은 충북의 영동과 제천에서도 좌익 테러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청주에서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청주의 자생적인 우익단체들이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연합 활동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청주 우익 단체 간 갈등, 대청과 족청의 충돌로 번져
1947년 청주에서 활동한 주요 우익단체는 대청-족청-서청이었다. 하지만 활동의 절대적 우위는 대청이 점했다. 심지어 대청은 족청에 대한 테러도 일삼았다.
대청 청원군 내수지부 단원 20명은 1947년 10월 19일 괴산군 증평면(현재의 증평군) 화산리에서 모임을 한 후 귀가한 족청 증평지부 단원들을 습격했다. 족청 단원들이 증평 화산리 대청지부에 보복하기 위해 갔으나 경찰이 제지했다. 또한 대청 단원들은 1947년 11월 초 족청 충북본부를 습격해 떼낸 간판을 갖고 도망치기도 했다.
대청은 족청이 '빨갱이의 소굴'이라며 족청 분쇄를 위해 혈안이 되었다. 급기야 대청 단원 2명이 1948년 3월 5일 족청 단원 부인을 체포해 사무실에 감금했다. 이들은 그녀 남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심문을 벌였다.
대청과 족청간 갈등은 족청이 좌익을 회원(단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불거졌다. 사실 청주에서도 족청에 좌익들이 대거 단원으로 가입했다. 그런데 족청에 가입한 좌익 대다수는 사상을 전향한 것이 아니라 위장 가입이었다. 'G-2 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청주 지역의 족청지부 조직에서는 원래 민청원들이나 민애청원들을 받아들여 우익진영으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족청의 의도와는 달리 반대로 족청의 우익청년 회원들이 좌익진영으로 전향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반해 족청에 가입한 민애청원들은 대부분 혁명사상으로 무장된 핵심세력인 남로당원이었기 때문에 우익진영으로 전향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
청주여맹 결성식에 페인트 뿌려

▲청주극장 1950년대의 청주극장
<삼호사진관의 추억>
청주극장 안에는 흰옷을 입은 여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47년 7월 21일 열린 청주 여성동맹(여맹) 결성식 때문이었다. 400개의 좌석이 꽉 찼고 복도에도 참석자들이 빽빽하게 앉거나 서 있었다. 청주 출신으로 여맹 중앙위원이기도 한 조창숙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결성식이 시작되었다.
그때 2층 발코니에서 일부 청년들이 야유를 했다. 행사에 참석한 여성들이 "조용히 해!"라며 고함을 쳤다. 행사장에 잠입한 우익청년들은 여성들에게 쌍욕을 했다. 그때부터 행사는 원만한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둥이를 지참한 우익 청년들이 곳곳에서 여성들에게 몰매를 가했다.
비명을 지르는 여성들이 출입구로 몰릴 때였다. 2층에 있던 이들이 여성들에게 페인트를 뿌렸다. 여성들의 흰옷에 페인트가 묻었다. 극장 밖에서 본격적인 테러가 벌어졌다. 우익 청년들은 옷에 붉은 색 페인트가 묻어 있는 여성들만 보면 주먹과 몽둥이 세례를 퍼부었다. 좌우익 청년 2000명이 어우러져 몸싸움을 했다. 청주여맹 결성식을 무산시킨 우익 청년은 홈정흠, 백홍기, 권태원 등이었다.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우익청년단체는 1947년 내내 좌익단체와 지도자들을 테러했다. 1946년과 마찬가지로 충북 민전을 수차례 습격했다. 이런 와중에도 청주지역 노동자들은 1947년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 행사를 치루었다.
청주 노동자 5000명은 1947년 5월 1일 오전 8시 25분터 9시까지 시내 7개 방향에서 행진을 했다.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9000명으로 불어났다.
경찰 측에서는 충북 민주주의민족전선 측과 교섭을 요청하였으나, 민전 측에서 체포된 노동자 60여 명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여 교섭이 결렬되었다. 경찰에서는 오후 8시 30분부터 2일 오전 5시까지 비상경비를 하였었는데 시위대는 청주부(淸州府) 일대의 산에 집합하여 날이 새도록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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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승만 벤치마킹한 우익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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