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심천변에서 반탁집회하는 모습. 마이크를 잡은 이는 정태성.
청주근세60년사화
"반탁은 어린아이에게 커다란 어른 옷을 입히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금 미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고, 우익 청년들은 슬쩍 자리를 피했다. 당시 사과 괘짝 위에서 연설을 한 청년은 부강 대지주의 아들이었고, 동경대 유학생 출신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었다.
흥분의 도가니
부강에서의 좌우 대결을 시발점으로 청주 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포문은 좌익이 먼저 열었다. 1월 2~3일경, 오창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 시위가 열렸다. 좌익 20~30명이 시장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했다.
1월 7일, 충북인민위원회는 청주 약국 네거리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부용면, 오창면, 강외면 등 청주의 동서남북에서 농민들이 참석했다. "미군정 물러가라! 인민공화국 만세!"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입하는 농민들의 손에는 곡괭이, 쇠스랑,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약 천 명이 모인 집회의 지도자는 신형식이었다. 청주약국 네거리에서 집회를 마친 이들은 중앙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 안에 있던 동지사(同志社) 앞에서 우익 단체와 부딪혔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아래 독촉중협)의 김철을 중심으로 우익 단체가 총집결했다. 농기구를 든 집회 참여자와 전문 주먹잽이들의 싸움은 게임이 되지 않았다. 좌익 청년들과 농민들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았을 때 경찰과 CIA가 출동했고, 좌익집회는 곧바로 진압되었다.
이토록 좌우가 극단적인 대립 전선을 형성한 가운데 정국의 물꼬가 터지는 듯했다. 1946년 1월 8일, 보수 우익과 좌익을 대표하는 네 개 정당(한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대표가 만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신탁통치 문제는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4당 캄파(Campaign)'였다. 그러나 합의는 양 진영의 주류 세력에 의해 깨졌다. 4당 합의는 이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본격적인 반탁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익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월 13일, 독촉중협 주최로 4만 명이 참가한 반탁 시위가 벌어졌다(<동아일보>, 1946년 1월 18일 자). 1949년 당시 청주·청원 인구가 약 25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집에서 한 명씩 참여한 셈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되살리려는 불씨가 피워졌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회의 시작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 및 사회단체를 선택하는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다. 소련은 반탁운동을 한 단체를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그해 5월 13일 결렬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던 날, 청주에서는 좌우익이 충돌했다. 경찰은 좌익 14명을 체포했다. 5월 15일에는 무심천 광장에서 독립전취 도민대회가 개최되었고, 3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탁 집회가 벌어졌다(<동아일보>, 1946년 5월 20일 자).
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전후해 반탁 순회 강연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청주를 비롯한 충북 지역 각지를 돌며 반탁 강연과 반탁 청원서 서명 운동을 벌였다.
1947년 6월 23일에도 청주 운동장에서 반탁 집회가 열렸는데, 독촉국민회는 각 가정에서 한 명씩 참석시키라는 조직 동원 지침을 내렸다(주한미군 정보 보고서, G-2 보고서, 1947.6.24).
반탁=애국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익은 반탁 집회를 조직적으로 벌였는데, 그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존재했다. 반탁운동은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이 주도했으며, 이는 실상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과 연결된 것이다.
즉,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임시정부법통론을 주장하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임시정부 수립론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들은 1947년까지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을 반탁 운동과 연계했다.
이 과정에서 반탁 운동은 자연스럽게 반소·반공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왜곡 보도했다면, 반탁 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단일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반탁 운동은 남북·좌우 연합이 아닌 임시정부 추대 운동을 통한 (남한 우익의) 독자적인 집권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적 구상에 야합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친일 행위자들(반민족행위자들)이다. 해방 후 한민당과 독촉중협에 슬쩍 다리를 걸쳤지만, 이들은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반탁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이때다 싶어' 반탁 운동에 편승했다. 반탁을 지지하면 애국자, 찬탁을 지지하면 '매국노'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반탁이 곧 반소·반공 운동으로 이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이후, 청주 지역 사회는 '탁치정국'에 빠지게 되었다. 좌우는 극단적으로 분열되었고, 대립과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경찰과 미군정, CIA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정신이나 미소 공동위원회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반탁 진영에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이 정치적 사건은 좌익이 몰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민중들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탁 진영의 정치 논리에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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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근세60년사화편찬위원회, 『청주근세60년사화』, 1985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 1989
서중석, 『한국현대 민족운동 연구』, 1991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충북학연구소, 『해방과 전쟁기 충북자료집 1』, 200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국사편찬위원회, 「강동정치학원 출신 3인의 이야기」, 2008
충북역사문화연대, 《지도 들고 청주시현대사 여행》, 2008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2023
<G-2 보고서> 194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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