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 선정을 위해 논의 중인 참가자들
권유정
<길 위의 스튜디오>는 여행지의 결정부터 여행의 전 과정을 참가자들이 선택하는 자유 여행이다(관련 기사 :
월급 모아 여행 가는 발달장애 직장인들, 단짝과 떠납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선택을 무작정 따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발달장애인들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리고 선택의 경험이 드문 만큼 책임을 져 본 경험도 드물다. 내 선택에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예측하기 어렵고, 문제가 예상되어도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선택의 기회도 제한되지만, 책임의 무게에서도 벗어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사소한 선택을 지나치게 망설이기도 하고, 반대로 무책임한 선택을 아주 과감하게 하기도 한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여행지를 선택하도록 하면 쉽사리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참가자들도 있지만, 현실적인 일정이나 비용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하는 참가자들도 있다.
각 그룹별로 가이드북을 참고해 여행지를 조사하고, 발표 및 논의 과정을 통해 여행지를 결정했을 때 두 그룹은 첫 번째 여행지로 대전과 부산, 국내 여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 그룹은 오로지 해외여행을 강조하며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선택 이유의 주된 이유는 마리나베이 샌즈의 인피니티풀.
국내 여행 먼저 다녀오고 천천히 진행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소수 의견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다수 의견을 좇아 싱가포르 여행부터 추진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무조건 싱가포르' 팀의 최종 결정은?
그래서 다른 그룹들이 첫 번째 여행 준비에 돌입했을 때, 싱가포르 그룹은 갈 수 있는 일정과 항공권, 숙박비 등 예상 비용에 대한 검토를 먼저 했다. <길 위의 스튜디오>의 여행 교육은 참가자들의 선택에 따라 다음 진행이 달라지는 완전 맞춤형 수요자 중심의 수업이다.
싱가포르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4박 5일은 필요하다는 것, 직장 초년생이 많음을 감안해 연차를 최소화하려면 추석 연휴나 연말 휴일을 끼고 가야 한다는 것, 그런데 추석 연휴 싱가포르 항공권은 다른 날짜에 비하여 50만 원 이상 비싸다는 것, 그리고 마리나 베이 샌즈의 1박 비용도 90만 원 정도 예상된다는 것을 확인하자 참가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돈은 부모님이 내니 거침없던 학창 시절과 달리 현재 참가자들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여행 비용도 자신의 소득으로 지불하는 비율이 꽤 높다. 그렇다 보니 이전보다는 상당히 경제 관념이 생긴 듯했다. 사실 적당한 여행의 기준은 가정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크다. 그래서 <길 위의 스튜디오>는 시작 전 당사자와 보호자의 욕구를 조사했고, 또 당사자들의 직장소득과 연차 등을 고려해 일정과 예산의 기준선을 정하고 있다.
'무조건 싱가포르'를 외치던 참가자들은 직접 정보를 찾아보고 문제를 깨닫자 드디어 마음을 바꿨다. 항공권 가격을 찾아본 후 비용이 적당하고 연차를 적게 낼 수 있는 연말로 싱가포르 일정을 미루고, 연말까지 시간이 많으니 국내 여행을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그룹들과 같은 결정이다. 아마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통보를 했으면 더 빠르고 효율적인 결론이 되었을 것이다.

▲ '무조건 싱가포르팀'이 여행지를 바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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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는 같을지라도 누군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과 스스로 고민해 선택한 것은 과정 안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다르다. '선택'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습은 다른 누군가 대신해 준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딜지라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칠 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디딘 곳만이 나의 버팀목이 된다. 타인이 만들어준 발판은 쉽게 무너진다.
지금 참가자들이 시간 들여 고민한 과정들은 분명 다음 선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진짜 '자유' 여행을 할 수 있고,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다.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하고, 함께 하는 타인을 배려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참가자들이 온전히 납득하고 이해하여 수용하는 것. 그것이 <길 위의 스튜디오>의 자유여행이다.
우여곡절 끝에 세 그룹의 첫 번째 여행지가 결정되었다. 물론 앞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 산더미이다. 어디를 갈지, 어떻게 갈지, 무엇을 먹을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보도 많이 찾아야 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 해야 하고, 머리 아픈 고민도 해야 할 것이다.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선택을 번복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것이고, 선택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마음 편히 남들이 정해준 대로 따르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자유여행은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만큼 즐겁고 신나지만은 않는다. 자유의 무게는 꽤 무겁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 정답이 없는 길을 헤매는 막막함, 잘못된 선택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 하지만 그 어려움 끝에 찾아올 성취감은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내 손으로 선택하고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자유의 여정. 내 힘으로 헤쳐나가는 그 길은 그 어떤 여행보다도 값지고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임을 믿기에 우리는 용감하게 자유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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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들과 여행하는 특수교사. 여행을 통해 교실을 벗어나 길 위에서 보다 실제적인 삶을 가르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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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인피니티풀 포기한 직장인들이 대신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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