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제주살이 로망이 깨졌을 때 나를 살린 것

도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평생학습 플랫폼, 제주도민대학에서 만난 글쓰기

등록 2025.09.17 08:43수정 2025.09.17 08:4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주에 살면 매일 자연 속에서 아이와 뛰어놀며 여유를 누리겠지."

제주로 이주하기 전, 내가 품었던 가장 흔한 로망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바다는 젖은 빨래만 남겼고, 숲은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지친 숨소리만 남겼다.


에어컨을 끄기에는 아직 너무도 더웠던 늦여름의 끝자락. 그늘 아래 스며드는 가을 바람을 느끼던 순간,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의 내 삶을 버티게 한 건 자연이 아니고 '배움'이었다. 그리고 그 배움은 뜻밖에도 제주도민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시작됐다.

뜻밖의 전환점, 도민대학 글쓰기 수업

결혼 전 나는 복싱, 필라테스, 한강 러닝까지 즐기던 운동 마니아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는 운동은커녕 밤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몸은 무너졌고, 체력은 바닥났다. 거울 앞에 서는 게 괴로웠고, 결국 나를 돌보는 일을 포기했다. 그렇게 쌓인 무관심은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운동을 다시 시작할까 했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끌린 건 '강의'였다. 지난 7월 우연히 알게 된 제주도민대학 글쓰기 수업에 등록했다.

제주도민대학은 도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평생학습 플랫폼이다. 도민이 직접 강좌를 제안하거나 원하는 수업을 신청할 수도 있다. 전문 강사가 아니어도, 깊이 있는 경험과 취미가 있다면 도민 강사로 나설 수 있다. 도민이면 누구나 학생이자 동시에 강사가 될 수 있다.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 수업의 강사님은 10여 년간 라디오 작가를 하셨던 분이셨다. 강사님은 단순히 글쓰기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강사님의 첫 시간, 첫 마디는 이러했다.

"이건 에세이를 쓰는 수업이기도 하지만, 자기 돌봄을 위한 글쓰기입니다."


그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늘 글을 쓰기 전 검열부터 하던 내가, 그 순간 '그냥 써도 된다'는 용기를 얻었다. <아티스트웨이>에 나오는 '모닝페이지' 작성에 대한 내용과 함께, 마음을 기록함으로써 얻게 되는 힐링의 시간. 글쓰기는 내 삶을 버티는 작은 기둥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주도민대학 7월 수업 자기 돌봄을 위한 글쓰기를 하라고 이야기 해주신 김현정 강사님 수업 모습.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
▲제주도민대학 7월 수업 자기 돌봄을 위한 글쓰기를 하라고 이야기 해주신 김현정 강사님 수업 모습.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 이현숙

지금도 열리는 배움의 기회

글쓰기 수업은 시작일 뿐이었다. 배움이 내 삶을 다시 세워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도민대학의 다른 강좌에도 관심이 갔다.

16일(화) 오후 2시부터 10월 제주도민대학 교육과정 모집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글쓰기 수업은 물론이고, (만화가 아니고)민화 그리기, 채소 요리 레시피, AI 활용하기 등 다양한 강좌가 준비돼 있다.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지친 일상에서 나를 다시 세우는 배움의 자리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기회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숨 고르는 쉼터일 수도 있다. 나처럼 육아와 생활에 치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부모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게임처럼 즐기며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육아 속에서는 그런 에너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운동도, 자기 관리도 끊겼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글쓰기는 달랐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와 한 페이지를 적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안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다." 글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른 배움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로 이어졌다.

제주살이에서 내가 꿈꾸던 로망은 자연 풍경이 아니었다. 나를 버티게 한 건 글쓰기였고, 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 건 도민대학 같은 배움의 장이었다.

관광객은 인생샷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나는 기록으로 내 생존을 남긴다. 그 기록이 쌓여 언젠가 지금의 나를 지켜준 증거가 될 것이다. 제주살이의 로망은 풍경이 아니라 배움 속에서 완성된다.
#제주살이 #사는이야기 #도민대학 #글쓰기로돌봄 #엄마의배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해안도로 곳곳에 나타나는 '경고'... 강릉 바다가 위험하다 해안도로 곳곳에 나타나는 '경고'... 강릉 바다가 위험하다
  2. 2 '평택' 밑으로는 인재 못 간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딨나 '평택' 밑으로는 인재 못 간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딨나
  3. 3 황혼 육아 고단함 날린, 며느리의 뜻밖의 선물 황혼 육아 고단함 날린, 며느리의 뜻밖의 선물
  4. 4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해?" 판사 제자에게 묻고 싶은 말 "설마 너도 그렇게 생각해?" 판사 제자에게 묻고 싶은 말
  5. 5 박찬대 40.5%, 박남춘 9.8%, 김교흥 5.4%...박찬대, 유정복에 오차밖 우세 박찬대 40.5%, 박남춘 9.8%, 김교흥 5.4%...박찬대, 유정복에 오차밖 우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