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그냥 두지 않았던 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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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단숨에 잡아끄는 알림이 있다. 확~ 변신을 꿈꾸게 하는 패션 쇼핑몰도 아니고, 팡~ 하고 로켓으로 달려오는 사이트도 아니며, 쓱- 하고 꼬시는 앱도 아니었다. 바로 '유통기한 임박몰'이다.
기업들이 야심차게 내놓았다가 데드라인에 발목 잡힌 상품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시간 많은 나 같은 백수에게는 이곳이 바로 천국 몰. 고기는 바로 요리해 먹을 수 있고, 며칠 안 남은 가공품도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리면 그만이니까.
지난 7월 그날도 알림을 따라 앱에 들어가자 눈이 번쩍 뜨였다.
"비타민C 4990원."
1박스에 30일 분량이라니, 하루 166원으로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다니! 건강정보프로그램을 오래 맡았던 작가의 눈으로 꼼꼼히 따져본다. 브랜드, 원료, 식약처 인증, 1일 섭취량 충족, 오케이! 심지어 무료배송. 더블 오케이!!
"한 박스만 살까?"
남편의 얼굴이 스치고 "두 박스." 아들 얼굴이 지나가며, "세 박스." 결제창으로 향하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제목을 다시 읽는다. 1박스 옆에 숨어있던 숫자 0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비타민C 10박스 4990원.
4990원인데? 그럼 1박스에 499원? 이거 실화 맞지?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결제 완료. 배송을 기다리며 나는 설레는 십대처럼 두근거렸다.
내 쇼핑의 역사는 고등학생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내 취향'을 찾고 싶었다. 말 모양 로고가 붙은 청바지를 사달라며 한 달을 졸랐다. 예쁘게 보이려고 설거지도 하고, 아침에도 벌떡 일어났다. 성적표 하나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현실의 답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신세계 백화점 돌계단을 오르던 날,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설렜다. 엄마는 손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한 장 두 장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점원 앞에서 돈을 건넸다. 그러다 다시 돌아서 한 장 두 장 확인 사살을 했다. 행여 한 장이라도 무임승차를 할까 싶어서.
다음 코스는 2층 여성복 코너다. 엄마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몇 바퀴나 돌았지만 나는 지쳐도 투덜대지 않았다. 새 옷을 입고 학교에 갈 생각 하나로 배고픔마저 잊을 수 있었다. 쇼핑은 그렇게, 도파민이 솟는 달콤한 맛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클릭 몇 번이면 끝난다. TV 홈쇼핑, 온라인 쇼핑, 리퍼몰, 빈티지몰, 유통기한 임박몰까지. 쇼핑의 신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발품 팔던 노동은 사라지고, 눈과 손가락만 바쁘다.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걸 생각하면, 그 기대만으로도 내 미래가 아까워 죽을 수가 없다.
'고객님의 문 앞에 배송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대형 상자. 커터칼로 조심조심 상자의 배를 가르자 비타민 10박스가 줄지어 나를 반긴다. 진짜였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남편은 "이걸 다 언제 먹냐"며 웃더니 한 박스를 챙겼다.
아들은 "유통기한 그까잇꺼" 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또 한 박스를 챙긴다. 나는 오늘의 비타민C 한 알을 삼키며 피로를 달랬다. 백수의 과로사는 피할 수 있겠다.

▲우리집 건강코너 절대 과로사 할 수 없는 프로백수매뉴얼. 기회는 찬스로 얻은 득템 전시장
마음의 온도
인생은 늘 대박을 꿈꾸지만, 실상 우리 앞에 그런 순간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대박은 이런 소소한 하루의 득템인지 모른다. 팔아야 하는 사람에게 임박은 '위기'였겠지만, 나에겐 새로운 '기회'였다.
비타민 10박스 앞에서 알았다. 인생을 버티게 하는 건 커다란 성취가 아니라,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는 감각이라는 걸. 내일을 살게 하는 건,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오늘을 견딘 힘이다. 이렇게 살아 낸 하루가 쌓여, 결국 인생이 되는 것임을.
오늘도 맛있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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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공중파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광고홍보 프로덕션 운영.
(현)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 /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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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10박스에 4990원? 그 돈 쓰고 알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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