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탄고도의 폐광 마지막 광도. 마지막 사람. 마지막 석탄.
노태헌
보통 걷다 보면 일상 자체의 시야가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길을 따라 생각의 관점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실제 길을 걷기 시작하면 뇌 한쪽에 자리 잡았던 삶의 무게들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9월의 강원도 운탄고도에 올랐다. 지난 5월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절기마다 찾아왔으니 다음번엔 눈 내린 겨울에 방문할 예정이다.
함백산 정상 인근에서 시작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운탄고도. 하이킹과 트레킹의 중간 정도 길이로, 이 길은 1980년대까지 '정선, 사북, 태백, 고한' 지역에서 석탄을 나르던 길이었다. 탄광을 매개로 경제 단위가 이루어진 이 지역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석탄이 가장 중요한 산업 기반이기에, 한국 경제에 상당한 역할과 책임을 가진 바 있다.
석탄은 각 가정에 온기를 불어넣는 연료로 쓰였고, 연탄 나르기(사람이 줄을 서서 연탄을 주고 받는 과정을 상상해보라)는 1990년대까지 종종 하곤 했으니 그리 사용된 지 오래된 화석연료가 아니다. 그러나 이후 석탄 산업은 쇠퇴했고, 마지막 탄광도 문을 닫았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석탄을 나르던 길의 보존과 백두대간의 허리를 걷는 길로서의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지금의 길이 생겨났다.
해외에도 산업의 쇠퇴 이후 활용된 폐광과 같은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 루르 공업지대와 뉴욕의 하이라인이 있다. 루르 공업지대는 한때 유럽 최대의 석탄·철강 산지였지만 산업 쇠퇴 이후 거대한 탄광, 공장, 수로, 철도망 등을 예술·문화·생태 복원 공간으로 되살려냈다.
졸퍼라인 탄광처럼 산업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이자 산책로·공연장·박물관이 된 사례가 있고, 우리도 그런 장소를 계속 물색해 나갈 것이다. 오래된 굴뚝은 전망대로, 공장 건물은 예술 작업장이나 행사장으로, 실내외 공간 전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재생의 매개가 된다면 죽었던 공간은 다시 살아나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이권이 덜 개입된 재개발과 재건축의 가능성이다.
운탄고도에서 느끼는 삶의 단순함

▲9월의 운탄고도 여름의 마지막 자락에서
노태헌
뉴욕의 하이라인은 옛 화물철로를 고가 산책로와 도시 공공 정원으로 바꿔 놓았다. 구조물 일부를 그대로 보존해 과거의 자취를 느끼게 하고, 현대적 공공 예술과 자연 경관을 접목한 공간은 시민과 방문객에게 색다른 걷기를 제공한다. 비슷하게 브루클린의 도미노파크는 설탕 공장을 친환경 산책 공간과 어린이 놀이터, 지역 예술의 장으로 재해석했다.
이런 길보다 훨씬 좋은 길이 한국의 운탄고도다. 절경이 펼쳐지면 산이 70%인 나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뻗어가는 대한의 정기를 가슴 안에 품을 수 있다. 산이나 바다 앞에 서면 소유의 개념은 무색해진다. 산이 있어 오르고, 바다가 있어 바라본다. 삶은 단순하다. 생명들은 움직이고 물결치며 태양의 기운을 담아낸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진실과 거짓, 애쓰지 않아도 살아가면 된다는 사실이 몸으로 배어든다.
이처럼 길을 걸으면 떠오르는 것은 다양하다. 소중한 것, 고민, 과거의 일, 함께한 얼굴, 지금 소망하는 것들이 풍경 속에서 겹쳐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발걸음 소리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배경, 녹색 덩어리 같은 생명의 기운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정화의 작용을 한다. 언제나 풍경은 나긋이 있지만 무성음의 말을 건넨다. 능선이 흘러내리는 산자락에서 흐려지던 눈동자가 밝아진다. 절경 앞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더이상 나를 누르는 이 침묵이 무겁지 않다.

▲트레킹과 하이킹의 중간 운탄고도 걷는길
노태헌

▲이국 같은 곳 운탄고도에서
노태헌
우리네 삶은 때론 좋은 대화가 책임진다. 들숨 하나에 타인을, 날숨 하나에 나를 담아 건네는 진심이라는 통함. 걷기를 통해 바흐친이 말한 '대화의 춤'은 자연과의 대화로 바뀐다. 지구의 자전에 맞춰 걸어가며 삶을 돌아본다. 잠깐이라도 소유에 대한 생각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곧 계절이 바뀔 것이다.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풍경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것은 소중한 현재. 부상하는 현재라는 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 깊이 들어가는 것. 과제였던 그것이 충만한 삶이 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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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을 나르던 그 길, 걷다 보면 눈이 맑아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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