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촉구 양육자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고교학점제가 요즘 교육계의 화두다. 도대체 고교학점제가 뭐길래 이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에서 고교학점제가 최초로 논의된 때는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였다. 우리 교육의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논의가 있었고, 당시 주무 과장 이상이 참석한 회의에서 열띤 논쟁이 있었다.
찬성론은 우리 학교 교육의 변화를 위해 선진적인 고교 모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반대론은 우리 현실과 맞는지 불분명하며, 고교 교육의 큰 변화는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장기 검토 과제로 발표되었고, 바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이를 국정 과제로 채택하였다.
'학점제'라는 말도 없는 미국 고등학교
고교학점제의 원조 격인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교에서는 이 제도에 대한 명칭도 없다. 고등학교의 운영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크레딧 시스템(Credit system)'이라고 하긴 한다. 서구의 고등학교 운영 체제는 대학과 유사하다.
대학 예비 학교로 고등학교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근대 공교육 체제 이전에는 가정 교육을 마친 후 라틴 그램머 스쿨(Latin Grammar School)에 가서 대학 준비 과정을 밟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이 그램머 스쿨의 현대화된 형태가 하이스쿨(high school), 즉 고등학교다.
새롭게 대중화된 고등학교가 고전을 가르치는 대학 준비 학교로서만 역할을 할 것인지, 20세기에 들어 요구되는 과학, 공업, 상업 등 다양한 실용적인 지식도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그 결과로 여전히 이중 체제를 유지하는 유럽 모델과 일부 사립을 제외하고는 통합 모형을 지향하는 미국 모형으로 나뉘게 되었다. 다양한 선택권 보장을 지향하는 고교학점제의 운영 체제는 미국 고등학교 시스템이 더욱 가까운 모델이다.
선택형 교육과정으로서의 고교학점제
미국식 고교학점제는 다른 말로 하면 '선택형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주(State) 정부는 언어, 과학, 수학, 사회 등 각 교과군의 최소 이수 학점만 정하고, 나머지는 지역 학교구에서 세부 교과목을 개설한다. 우리식으로 보면, 주 정부는 총론만 만들고 각 과목별 각론은 지역의 일인 것이다.
예컨대 어떤 내용을 사회 과목으로 정할 것인가 그리고 개설되는 사회 과목의 종류를 지역과 학교에서 정한다. 이에 따라 지역마다, 학교마다 개설 과목과 과목 명칭이 크게 다르다. 재정이 열악한 지역은 다양한 교과목을 개설할 여력이 없으므로 지역별 편차가 발생하고, 이는 미국 교육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개설 과목의 가장 큰 특징은 분야별·수준별 다양성에 있다. 분야의 다양성 예를 보면, 제대로 된 규모의 학교에서는 20여 종 이상의 사회 교과가 운영된다. 제공되는 프로그램의 다양성은 놀라울 정도이며, 이 다양성은 고등학교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교과목은 대학의 교양과정 다양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준별 다양성은 평준화 체제에서 수월성을 추구하고 능력의 편차를 완충하는 제도이다. 수학을 예로 들면, 대수학이 있다면 기초 대수학, 대수학, 고급 대수학 등으로 과목이 수준별로 세분된다. 고등학교에서 우리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일차방정식을 다루는 수업이 제공되기도 한다.
능력별 이수는 낙제를 방지할 뿐 아니라 수월성을 담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각 교과에는 부담 없이 이수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과목이 다양하게 개설될 뿐 아니라 대학 수준의 AP 과정도 제공된다.
이런 다양성은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학업에 흥미가 없는 학생은 자신이 듣고 싶은 쉬운 과목만 골라서 고교 과정을 마치게 된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선택 과목만 이수할 수 있다고 하여 '카페테리아 교육과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요리, 목공, 심지어 뜨개질만 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비판도 있다. 진로와 적성을 고려하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선택권 보장으로 출석만 하면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식 고교학점제를 가능하게 한 제도들
미국식 고교학점제의 작동에는 몇 가지 제도가 함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안정적인 교사 수급 시스템이다. 각 지역 학교구(우리의 시·군 교육청에 해당)나 고등학교마다 개설된 교과에 필요한 교사를 선발하고, 순환 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교과 운영의 지속성이 가능하다. 교사들은 다양한 교과를 담당하기 때문에 취업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복수 자격을 취득한 교사가 많다. 반면 우리의 경우 교사의 이동은 고교학점제 운영에 큰 장애 요인이 된다.
교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제도는 표준 시수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표준 시수가 명확하지 않으면 교사 간 격차가 발생하거나 과부족 현상이 생기기 때문에 표준 시수 제도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 중 하나이다. 교사의 시수와 학생의 이수 시수는 별개의 문제다.
둘째, 수준별 다양성을 보완하는 시스템이다. 동일 과목의 상위 수준 선택은 불리할 수 있으나 가점을 주어 이를 보완한다. 예컨대, 만점이 5점일지라도 상위 과정 이수자는 5점 이상의 평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A와 높은 수준의 B가 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대학 입시에서는, 각 대학이 어떤 수준의 과목을 이수했는지를 중요한 평가 요소로 본다.
셋째, 공정한 반 배정 및 평가 시스템이다. 기본 공통 과목의 경우 무작위로 반 배정을 하기도 한다. 이는 점수를 잘 주는 교사를 선호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교사 간 평가 격차를 줄이기 위해 기말고사는 공동 출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평소 수업 과정에서의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사 간 편차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
넷째, 교사의 주도성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고교학점제 시스템에서는 교사의 주도성이 매우 크다. 출결, 수업 참여, 과제, 평가 등을 모두 종합하여 학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절대평가다. 교사 주도 교육과정 운영과 교사 주도 평가는 미국식 교육과정 운영의 핵심적 특징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교육이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평소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사마다 내용과 평가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기초학력 보장을 위한 외부 학습은 몰라도 내신 대비 과외는 실익이 적게 된다.
다섯째, 물리적 인프라의 구축이다. 다양한 선택 과목 운영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 수가 있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의 규모가 매우 크며 우리의 작은 전문대학 수준인 학교도 많다. 우리의 군 단위에는 한 개의 고등학교만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시설은 애초부터 다양한 선택 과목 운영을 전제로 지어진다. 우리처럼 '1학급 1교실'을 기본으로 하는 개념은 없다.
미국식 고등학교 제도를 살펴보면 고교학점제, 교사 주도 평가, 입학사정관제가 하나의 세트임을 알 수 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나머지 제도의 순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의 경우 입학사정관제가 제일 먼저 도입되었고, 이제 고교학점제가 시작되고 있다. 교사 주도 평가는 아직도 멀다. 본말이 전도되었을 뿐 아니라 제도 자체도 온전하지 못하니 출발부터 삐걱대는 것이다.
대학 입시의 근간인 학생부 종합 전형도 누더기가 되어 가고 있다.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의 논쟁도, 근본적으로는 '가르치는 사람이 평가해야 한다'는 교육의 기본 원리를 보장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교학점제는 하나의 제도가 아닌 시스템 혁신
또다시 우리는 '귤이 탱자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식 제도는 미국의 토양에서 발전해 온 것인데 이를 정밀한 분석 없이 우리 제도에 맞추려 하다 보니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교사는 순환하고, 표준 시수도 없고, 농어촌에는 소규모 고등학교가 즐비하며, 아직도 많은 경우 수능이라는 객관식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있고, 교육 자치는 보장되지 못하고, 학교 시설은 비좁고 등등의 문제가 첩첩이 쌓여 있다.
고교학점제 도입은 고교 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그 자체가 교육 혁신이다. 이것을 그저 하나의 제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준비 과정도 현장의 수용성도 낮은 것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제도가 아니라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선진화를 위해 전 시스템을 혁신해야 가능한 일이다.
온 국민의 관심사인 대학 입시부터 세미나형 교실의 도입까지 정교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런 혁신이 필요하다면 지금부터라도 온 교육계의 지혜를 모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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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교육청 부교육감을 끝으로 교육부 생활을 마쳤고, 퇴직 후 공교육의 탄생과 발전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의 출발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공교육이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해법의 단초를 찾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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