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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모가지야" 영화 대사처럼... 서울시의 '어쩔 수 없다'가 자른 것

서울시립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 운영 종료, 위기 청소년들의 안전망 무너져

등록 2025.09.25 09:45수정 2025.09.2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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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쩔 수가 없다> 티저 예고편 중 한 장면
영화 <어쩔 수가 없다> 티저 예고편 중 한 장면 CJ ENM

"너, 모가지야."

최근 개봉한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주인공은 정리해고를 통보하는 대표에게 이렇게 말한다.

"해고는 도끼로 사람 모가지를 댕강 자르는 짓 아니겠냐."

이 대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지금 재취업을 준비한 지 석 달째인 사회복지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서울시립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에서 근무했다.

'나는봄'은 2013년 개소 후 위기 십대 여성 청소년들에게 의료·심리·생활 지원을 통합적으로 제공해 온 유일한 전문 기관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난 7월 4일, 어떠한 조례 개정이나 공론화 절차도 없이 운영을 종료했다.

타당하지 않았던 운영 종료의 이유들


운영 종료의 이유도 일관되지 않았다. "위탁 법인이 없다", "유사 기능 기관이 있다", "재정평가가 미흡하다", "신규센터 설립을 준비한다"는 설명이 번갈아 나왔지만, 어느 것도 '연속적 지원 체계'를 무너뜨릴 만큼 타당하지 않았다.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져야 할 청소년 복지를 행정 편의적 판단으로 단칼에 끊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와 동료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손바닥에 잊지 말아야 할 말을 적어가며 버텼다.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다짐, 행정의 부당함을 알리겠다는 약속을 새기고 거리로 나섰다. 국회와 시의회를 찾아가고 언론에 호소했다. 위기 청소년들의 생존과 권리를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서울시 담당자의 "지금 본인들 실직 걱정하는 거냐?"라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지켜 달라는 요구가 '밥그릇 지키기'로 폄하되었을 때 느낀 모욕은 깊었다. 하지만 더 분명히 말했어야 했다.

"맞다, 우리도 모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들도 모가지다. 당신들의 '어쩔 수가 없다'는 말 한마디로 잘려 나가는 것은 우리의 생계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권리와 삶이다."

복지는 자선이 아니다. 복지는 국민 모두의 권리이며,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특히 위기 청소년은 '적기성'이 핵심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개입이 있어야 청소년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그런데 서울시는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십 년 넘게 이어 온 지원 체계를 끊어냈다.

제도는 살아 있지만, 기관은 사라졌다

'나는봄'은 해마다 2천 명이 넘는 청소년을 상담하고 의료비와 주거·학업을 지원해 왔다. 그러나 서울시가 운영을 중단하자 아이들은 한순간에 갈 곳을 잃었다. 위기 청소년 지원 조례가 살아 있음에도 이를 근거로 한 기관이 사라진 것은 제도적 모순이다. 신규센터 설립도 지연되면서 현장의 공백은 고스란히 청소년들과 가족에게 전가되고 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은 마지막 재취업 면접장에서 손바닥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떨지도 않고 주먹을 꽉 쥐지도 않은 채 편안하게 면접에 응한다. 나는 이 장면이 오히려 모순적으로 보였다. 현실이라면 당당하기보다는 불안할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담담히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다. 혹시 현실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챙취하는 자들처럼 살아야만 당당하고 편안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서울시에게 말하고 싶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 한마디로 위기 청소년들의 삶을 잘랐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해 온 사회복지사들의 삶마저 댕강 잘라냈다는 사실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가, 아니면 '어쩌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닌가.
#서울시 #복지 #공공 #청소년 #어쩔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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