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등학교의 상황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기껏해야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어서 참담할 따름이다."
"교육부의 관료들이 학교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지난 9월 25일 교육부가 발표한 고교학점제 개선안을 두고 교사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교조와 교사노조, 교총 등 사실상 모든 교원 단체가 폐지 등 전면 재검토를 요청하는 상황이어서 교육부의 개선안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더욱이 급작스럽게 발표가 연기되는 등 진통을 겪어온 터다.
'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이번 개선안엔 지금 고등학교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인한 교사의 부담을 조금 줄여주겠다는 것뿐이다. 마치 학교 현장에 고교학점제가 취지를 살려 정착되기 힘든 이유가 오로지 교사의 과중한 업무 때문인 것처럼 호도하는 셈이다.
고교학점제의 한 축이랄 수 있는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최성보)'는 교육부와 교사들 사이의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 교과별 미이수 학생에 대한 보충 지도 시수를 기존의 1학점당 5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인 건, 애초 학점 이수의 기준 설정이 주먹구구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낙오자'로 낙인찍힌 아이에게 '벌받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흡사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내신 성적을 상대평가로 산출하는 방식이 상충한다는 지적이 들끓자, 내신 등급을 9등급에서 5등급으로 완화한 지난 정부의 대책과 겹친다. 내신 등급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입에서 고교학점제는 그저 느닷없이 늘어난 '잡무' 정도로 여겨졌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욕심은, 결국 게도 구럭도 다 잃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보충 지도 방식도 대면 수업을 의무화하지 않고, 100%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적이 황당하다. 교사들에겐 수업 부담을 확실히 덜어주는 최고의 '선물'이지만, 최성보의 취지를 고려하면 개선안이라고 하기 머쓱하다. 방과 후나 방학 중에 인터넷 강의 수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건데, 실효성이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교육부는 최성보의 교육적 효과를 확신하는 듯하다. 개선안과 함께 발표한 '1학기 학점 이수 기준 미도달 미이수 학생 현황'을 보면, 최소 성취 수준 미도달 학생의 비율이 7.7%였는데, 예방 및 보충 지도를 통해 대부분 이수한 걸로 파악됐다며 반색하는 모습이다. 최종 미이수 학생은 0.6%에 불과해, 언뜻 보면 최선의 대안인 양 여겨질 듯하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미이수 학생 수가 많으면, 해당 교과 교사의 부담이 크게 늘게 되어 어떻게든 그 숫자를 줄이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혹자는 학기 중에 열심히 가르치면 될 게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믿기 힘들겠지만, 명색이 고등학생인데 국어 지문조차 읽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갓 입학한 고1인데도, 수학 시험 시간엔 절반 가까이가 그냥 '찍고' 엎드려 잔다. 우리글이라 한결 수월할 것 같은 국어나 한국사 시험 때도 열에 두세 명은 시험에 '초월한' 아이들이다. 반마다 하위 30% 남짓 아이들의 성적은 과목과 상관없이 시험 당일의 컨디션이 좌우한다는 점에 모든 교사가 동의한다. 그런데도 그들 대부분은 최성보 이수 대상자가 아니다.
최성보를 통한 이수를 '학력 향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진단 평가 등 별도의 검증 없이 기준 시간을 채웠고, 인터넷 강의를 수강했다는 것만으로 학력이 향상됐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는 마치 '출석'과 '학습'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그냥 주어진 '벌'을 충실히 섰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게 맞다.
요즘엔 일과 중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피시로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는 걸 차단하는 학교가 많다. 교실 수업에 지장을 초래할뿐더러 교사의 눈을 피해 SNS나 비교육적인 콘텐츠에 휩쓸릴 우려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인터넷 강의는 수업을 듣는다기보다 '쇼 프로그램'을 구경하는 것에 불과해 교육적 효과가 떨어진다는 목소리가 팽배해있다.
대책이랍시고, 출결 관리를 학급 담임교사와 교과 담임교사 모두 할 수 있도록 바꾼 건, 교사들의 비판을 오해한 측면이 크다. 출결 확인을 학급 담임교사가 하느냐, 교과 담임교사가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기실 교과 담임교사가 교과 수업을 책임진다는 게 고교학점제의 기본 전제다. 하물며 출결 상황을 확인하는 일임에랴.
문제는 수업 때마다 일일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접속해 출결 상황을 기록해야 하는 일이 무척 번거롭다는 점이었다. 우선 'NEIS+'라는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한 뒤, 교실에서 출결을 확인하도록 했다. 수업 후엔 다시 NEIS에 접속해 'NEIS+'에 담긴 출결 기록을 불러와 저장한 다음 마감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NEIS+'는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무엇보다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세특)의 글자 수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식의 접근은 고교학점제의 취지 자체를 희화화하는 하책 중의 하책이다. 고교학점제의 시행으로 모든 교과의 세특이 학기 단위로 기재되어야 해서, 세특의 부담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현행 교과별 세특의 글자 수는 500자로, 연간 기준 1,000자다.
세특이 연간 1,000자에서 500자로 줄어드는 걸 반대할 교사는 없다. 다만, 향후 모든 교과가 절대평가 체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세특은 계량화된 지표로 매겨지는 성적을 보완하는 장치이자, 아이들 각자의 특기를 정확히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요체로서 불신을 받고 있지만, 세특은 죄가 없다.
시험의 유형도 선다형에서 서술형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선다형 시험에서의 높은 점수가 해당 교과의 핵심 역량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반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이의 도덕성을 선다형 시험의 도덕 교과 점수로 판단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른바 '합불' 방식의 절대평가 체제에선 점수나 등급은 사라져도 세특은 나날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기실 세특은 천편일률적인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세특을 의무화하면 기출문제 풀이식 수업과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을 교과의 특성에 맞게 다양화할 수 있다는 복안이었다. 학생부종합전형의 도입 취지와 맞물리면서 세특은 나름의 효과를 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 논쟁에 느닷없이 엉겨 '거래 대상'이 되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모양새가 됐다.
줄기차게 고교학점제의 폐지 또는 유보를 외쳐온 교사로서, 이번 개선안에 분노하는 지점은 정작 따로 있다. 최성보 이수 기준의 완화와 출결 관리 방식의 변화, 세특 글자 수를 줄여준다는 등의 내용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되레 이를 통해 교사 집단이 마치 교육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잖아도 교사들이 자기 귀찮아서 고교학점제를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질타를 받아온 터다. 고교학점제를 적극 지지해 온 교육정책 디자인 연구소와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등의 시민단체에서는 "이번 발표에도 폐지를 주장한다면 집단이기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선안의 내용만 놓고 보면, 그렇게 주장해도 딱히 반박할 수도 없다.
그들이 고교학점제의 시행에 찬성하는 이유는 하위권 아이들의 기초 학력을 공교육이 책임지도록 한다는 점 때문이다. 명문대 진학 실적에 목매단 기존의 고등학교 교육의 대전환을 몰고 올 거라는 기대까지 내비쳤다. 이에 대한 필요성과 시급성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실을 바늘허리에 메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언컨대, 고교학점제만으로 '잠자는' 아이들을 깨울 수도 없고, 기초 학력을 채워주는 것도 쉽지 않다. 당장 초등학교 때부터 순차적으로 학습 관리가 되어야 한다. 어릴 적 방치되면 해가 갈수록 누적되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일상의 한자어 뜻조차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피고인이 보석을 신청했다'는 뉴스를 듣고, 교도소에 보석이 필요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고등학생을 대체 어찌해야 하나. 반마다 이런 아이가 드물지 않다. 어쩌면 고교학점제보다 '중학교학점제'가 우선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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