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떡볶이 매콤달콤한 떡볶이 하나면 모든 피로가 끝!
이인자
1979년,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우리 집이 잠시 슈퍼마켓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바빴고 나는 종종 방치되었다. 그 무렵 동네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생겼다. 드디어 엄마표가 아닌 길거리표 떡볶이를 맛보게 된 것이다. 빨간 맛은 황홀했다.
얼마 후, 100원이 생기자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떡볶이 100원어치 주세요."
엄마에게 혼날 날 것 같은 두려움은 있었지만, 수북하게 담긴 떡볶이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돌아왔다. 역시 집에서 기다린 건 떡볶이보다 더 매운 엄마의 호통이었다. 엄마의 화는 나의 일탈 뿐 아니라, 100원이라는 금액에도 있었다. 나를 데리고 떡볶이 포장마차로 향했다.
"50원어치도 겨우 먹는 애한테 100원어치를 팔아도 되나요?"
엄마는 나의 작은 위장을 볼모로 조목조목 따졌다. 떡볶이집 아줌마가 밀떡 몇 가닥을 빼돌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나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50원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떡볶이 100원어치를 함부로 사 먹지 않겠다는 납득할 수 없는 맹세를 했다.
구멍난 양말 만큼 흔했던 떡볶이 먹고 싶은 날
이후 '떡볶이 100원어치 사 먹기'는 내 꿈이 되었다. 국민(초등)학생이 되자 용돈을 아껴 떡볶이를 사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등하굣길은 엄마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떡볶이가 먹고 싶은 날은 구멍 난 양말 만큼이나 흔했다. 가령 명절 전날에도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기름 냄새가 가득해도, 산해진미가 쌓여 있어도, 동생들을 꼬드겨 떡볶이집을 찾아다녔다. 문 연 가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구멍 난 양말이 감쪽같이 꿰매졌을 때 만큼이나 컸다.
떡볶이가 위로의 음식이 된 건, 중고등학교 무렵이었다. 도서관 앞 떡볶이는 어른들의 박카스 같은 밀가루계 자양 강장제였다. 떡볶이만 먹으면 시험에 기죽은 납작한 마음도, 엉덩이도 몽실몽실 탄력을 얻었다. 다시 해보겠다는 의지가 철판 위 국물처럼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중간고사를 망친 딸의 마음도 그때의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문득 7년 전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떠올랐다.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순간에도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떡볶이였다. 떡볶이는 대체불가한 한국인의 '소울푸드', 다정한 친구 같은, 때론 다시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였다.
명절 기간이면 꼬치 전, 동그랑땡, 깻잎전, 버섯 전... 온갖 전들이 기름탕 위에서 온종일 지글거린다. 그때 가장 반가운 음식은 당연히 떡볶이다. 그때의 떡볶이의 맛은 5성급 호텔의 최고급 스테이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딸도, 나도, 우리 가족도 떡볶이는 명절 연휴에 먹는 만장일치 메뉴다. 그때는 5만 원, 아니 그보다 더 비싼 가격이라도 아낌없이 사 먹을 것이다. 물론,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도 있지만, 바깥 음식이 주는 해방감도 함께 맛보아야 할 기쁨이다.
밀떡 한 봉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삼지창 같은 포크로 떡볶이를 찍는다. 매콤달콤한 소스와 말랑한 떡살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시험도, 명절도, 오늘의 피로도 그 한입에 사라진다. 뜨겁고 매운 그 맛 속에 오늘의 위로와 내일의 힘이 간절히 숨어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전직 광고 홍보인. 지금은 도서관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감동적인 글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2025 경기히든작가 당선,
책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삶은 도서관' 출간
공유하기
철판 국물처럼 다시 끓도록, 시험 망친 딸에게 사준 것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