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3월 25일, 한국여성민우회 부설 가족과성상담소 개소식. 앞줄에 앉은 사람 중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양해경 전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 당시 서울시에 운영비를 요구하러 직접 가셨다고 들었어요.
"1995년도에 당시 서울시장이 조순 시장이었고 정무부시장이 이해찬 전 의원이었어요. 그때 아마 저랑 정강자(한국여성민우회), 최영애(한국성폭력상담소), 이상덕(한국여성의전화) 이렇게 넷이었던 것 같은데 서울시에 찾아가서 정무부시장 면담을 했어요. '여기 이렇게 법이 만들어졌으니 운영비 지원해라.' 그랬더니 부시장이 얼마면 되겠느냐 이러는 거예요. 그때 우리가 '간땡이'가 작아가지고, 당시엔 국가가 사업비를 지원한다는 것도 크게 느껴졌는데 운영비를 지원한다는 건 너무 꿈 같은 거죠.
하여튼 간이 작아서 3명 인건비를 지원해달라고 하면서 거기에 운영비를 더해 1년에 4500만원 내외인가, 첫 지원비를 받게 됐어요. 그때는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죠. 근데 한 10여 년 지나고 보니까 여성폭력방지시설 중에서 성폭력상담소가 급여가 제일 낮더라고요. 그제야 생각이 들었죠. '아 그때 좀 크게 부를 걸'(웃음)."
- 상담소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무엇이었나요?
"예전엔 '성폭력'이라는 단어도 굉장히 낯설었어요. '강간' 이런 말 정도 쓰고, '성희롱'이라는 말도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았고요. '인권 침해' 이런 말조차 드물었어요. 피해자의 어려움과 힘듦을 세상에 알리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때만 해도 다 성폭력 피해자한테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사람들에게 아직 생소한 개념을 사회에 알리고, 피해자의 어려움을, 그리고 가해자는 형사 처벌해야 한다는 걸 사회에 알리는 운동 차원에서 시작을 한 거였어요. 어떤 피해자 한 명 한 명을 구제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운동 차원에서 한 거고, 운영비도 지원 받으니까 더 신나서 열심히 했죠."
- 근데 상담소라는 걸 처음 만들었을 때, 그 전에 성폭력 상담을 해본 사람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모든 게 막막했을 것 같아요.
"맨땅에 헤딩이죠. 상담소 설치 조건에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을 64시간 이수한 자(를 채용해야 한다)가 있었어요. 근데 그 교육을 누가 하겠어요. 아무도 없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1995년도에 조그맣게 있던 동북여성민우회 사무실에서 20명을 모아가지고 우리끼리 프로그램을 짜서 셀프로 교육을 했어요. 우리가 상담소 하기 전부터 부산에서 먼저 성폭력상담소 하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와서 '우리가 선배인데 민우회 와서 교육을 받는다'고 서운해 했죠. 이거 좀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웃음)."
- 실제로 상담은 어떠셨어요?
"그때만 해도 전화기 두 대였어요. 평동에 사무실이 있을 때 739-8858이랑 8859 두 대를 상담실 양쪽 부스에 놓았어요. 활동가들이랑 자원활동가 선생님들이 오전에 한 명 오후에 한 명, 하루에 네 명씩, 5일이면 이십 명이 돌아가면서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는 전화가 거의 다 계속 통화중이었어요. 한 번 전화 오면 30분, 1시간씩 통화하고 끊으면 또 바로 전화 오고. 자원봉사자 선생님 중 가장 자주 나와서 전화 받으시던 정우영 선생님은 너무 많이 받다 보니까 귓병도 났어요. 그때는 컴퓨터도 없고 다 수기로, 볼펜으로 기록했어요."
- 지금보다 훨씬 힘드셨겠는데요?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한 손으로 메모를 하고...
"그렇죠. 상담 끝나면 그걸 다시 다 정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들고."
- 완전 차원이 다른 업무량이었을 것 같아요. 그럼 통계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상담 건수가 꽤 많던데요?
"그때는 엑셀 프로그램이 어디 있어요? 일련번호 하나하나 다 적어가지고 직접 철하고 그랬죠. 자원상담원 분들이 부스 두 개를 다 지키고, 그렇게 했어요(한국여성민우회 역대 총회 기록에 따르면 가족과성상담소 한해 상담 건수는 1996년 2201건, 1997년 2389건, 1998년 3246건, 1999년 3570건이었다. - 기자 말)."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9년에 가해자교육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모 대학 여학생위원회 학생들이 '여자화장실을 몰래 들여다보던 남대생 하나 잡아 놨다, 얘를 교육 좀 시켜 달라'고 데리고 온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그 학생들이 누군지 궁금해요.
이 남학생한테 요구조건을 내걸었다고 하더라고요. '너 네가 한 짓을 대자보에 써 붙일까? 경찰에 신고할까? 여성단체 가서 교육 받을래? 세 가지 중에 선택해라.' 뭘 선택하겠어요? 당연히 교육을 받겠죠(웃음). 남학생은 울상을 하고 왔어요. 우린 이런 일이 처음이잖아요. 어떡해, 또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우리 상담활동가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짜서 교육을 했던 게 최초의 가해자교육이었어요."
"응징적 사법 아닌 회복적 사법 지향해야"

▲ 1996년 명동성당 앞 집회 현장. 왼쪽 두 번째 선 사람이 양해경 전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 오래 활동한 동력은 무엇이었던 것 같으세요?
"제가 민우회와 용인에서 성폭력상담소 소장만 딱 20년을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을 20년 동안이나 했는지 묻더라고요. 그럼 저는 두 가지를 얘기해요. 하나는 개인적으로 업무나 활동에서 얻은 감정을 내 개인 생활·감정과 분리하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거든요. 상담을 하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이 내 머릿속에 남는데, 분노·슬픔·화, 이런 감정을 상담을 딱 끝내고 내 개인으로 돌아가면 털어내야 해요. 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되더라고요."
- 그렇게 되는 데는 얼마나 걸리셨어요?
"한 2, 3년 걸렸던 거 같아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또 하나는, 돌이켜보면 나는 되게 재밌고 즐겁고 보람되게 일을 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전체적으로 사회가 우리 활동을 지지해줬어요. 그게 지금과의 차이에요. '좋은 일이네, 필요한 일이네, 그래, 이렇게 해야지' 하고 지지를 많이 받은 세대예요. 법이 만들어지고 제도화되는 데서 오는 성취감과 보람. 그러니까 내 개인적 감정의 분리와 사회적 성취감, 이 두 가지 때문에 오래 일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곤 해요.
지금하고 그때랑 다른 게, 지금 활동가들은 너무 힘든 상황인 것 같아요. 지지하는 층과 비난하는 층이 너무 양분돼서, 극단으로 갈려서. 지지하는 층도 많아졌지만 비난하는 집단도 많아져서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지금 소위 '이대남'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거지요."
- 앞으로 상담소가 더 고민하면 좋을 이슈는 무엇일까요?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주제 중 하나가 갈등조정이었어요. 예를 들어 요즘에 학교폭력위원회 열리면 다들 변호사부터 선임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뭐든지 일단 고소하고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요. 모든 갈등, 모든 문제가 법적절차로 가지 않고, 꼭 피해자와 가해자로 양분하지 않고 서로 조정하는 프로그램을 제가 용인지역에서 활동할 때 많이 해보려고 했었어요."
- 참 어려운 문제에요. 한편으론 법으로 인정돼야 할 죄가 너무 인정되지 않는 문제도 여전히 있고, 이제 또 모든 게 법의 언어로 해결돼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도 있고.
"그렇죠. 법적으로 해결하더라도 '응징적 사법'이 아닌 '회복적 사법'을 더 지향해야 하는데요. 사실 해결이라는 게 있을 수 없고 회복적 관점으로 문제를 접근해 가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고민을 지금 활동가들이 이어가 주시면 좋겠어요."

▲ 1987년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강당에서 개최된 한국여성민우회 창립대회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 1995년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제1회 성폭력상담원교육. 왼쪽 세 번째가 양해경 전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 2000년 동료 활동가들과의 모습. 오른쪽 첫 번째가 양해경 전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인터뷰를 마치며
양해경님이 말씀해 주신 '처벌 이상의 대안'에 관한 고민은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역사 속에서 2012년 '공생의 조건' 활동을 비롯해 최근 활발히 진행된 '성평등한 조직문화 만들기' 활동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가해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피해자의 삶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피며 그에 대한 사법적 조치의 사회적 영향까지 고민하는 접근법. 개별 가해자를 축출하기보다는 성폭력이 발생한 구조적·문화적 조건을 파악하고 공동체 전반을 변화시키는 일.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야 할 과제입니다.
1980년대에 여성학 세미나를 함께하며 새 여성운동단체를 창립해보자고 힘을 모았을 90여 명의 페미니스트 그룹을 상상해 봅니다. 또 양해경님과 당시의 상담소 원년멤버들이, 아직 가본 적 없는 길을 '맨땅에 헤딩'하듯 한 걸음씩 좌충우돌 내딛었을 순간들을 상상해 봅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우왕좌왕 현재도 어디론가 미래로 이어질 것입니다. 30년 전 활동가들의 용기에 힘입어 또 다시 용기를 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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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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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화장실 몰래보던 남자들에게 '가해자교육' 시킨 최초의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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