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민주당 안태준 의원이 지난 9월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전날 본회의에 상정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진행하는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저도 오늘 아침 느닷없이 연락을 받았습니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 할 의원이 없답니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인) 제가 필리버스터를 해야 된답니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국회법 일부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진행 중이던 지난 9월 28일 저녁, 마지막 토론 주자이던 더불어민주당 안태준 의원(경기 광주을)이 토론 중 답답해하며 내뱉은 말이다. 청중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수 야당의 대국민-대여 설득을 위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뜻하는 필리버스터, 즉 무제한 토론이 사실상 껍데기만 남았다는 점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안 의원은 무제한토론을 먼저 신청해 놓고 불참해버린 야당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제 왼쪽을(국민의힘 좌석) 보면 한 분도 안 계시는데, 대체 이런 필리버스터를 왜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신청해 놓고 자리에도 없다"라며 "저는 이걸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고 싶은데 제가 왜 국힘 의원이 안 왔다고 토론을 해야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또 국회법 개정안과 국회의 증언감정법 개정안 등 4개 법에 대해 야당이 신청해 벌인 지난 4박 5일 무제한 토론은 이전엔 보지 못했던 장면들로 구설에 올랐다.
"의장님, 잠시 화장실"... 10여 분 간 자리 비운 의원
가장 논란이 됐던 건 반대하겠다며 토론을 신청한 야당이 오히려 자당 의원의 토론 때도 자리를 내내 비우는 등 불성실하게 참여했다는 것. 야당 몫의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사법 파괴'라며 아예 불참을 선언해, 토론이 진행되는 4박 5일 내내 우원식 국회의장-이학영 국회부의장이 2교대로 자리를 지키며 회의 진행을 이끌어야 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무제한 토론 와중에 10여 분간 자리를 비운 의원도 있었다.
총 4박 5일 간 국민의힘 의원들 반대 토론은 약 67시간 10분, 민주당 의원들 찬성 토론은 약 25시간 50분 간 이어졌다. 실제 첫 주자로 나서 총 17시간 12분을 연설한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은 약 4시간 5분 가량 토론을 한 뒤 의장석을 향해 돈 뒤 "의장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라고 속삭이듯 말하기도 했다. 그는 10여 분 간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반대 토론을 이어나갔다. 당시 본회의장에는 정적이 흘렀고, 이에 따라 박 의원의 무제한 토론 영상은 1부-2부로 나뉘어져 있다.
법에 따라 하는 필리버스터에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 국회법 106조의 2(무제한 토론의 실시)에는 토론의 시작과 종결, 토론의 방법, 토론 도중 중지 상황 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화장실 이용 등 중간 휴식 관련 규정은 없다. 다만 여야 합의에 따라 중간 화장실 이용은 관행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토론은 의원 1인당 1회에 한정하되, 시간 제한은 없다. 하지만 재적 3분의 1 이상이 서명하면 종결동의가 제출되고, 이 경우 이때부터 24시간이 지나면 무기명투표로 표결해 토론이 종료된다(다만 재적 5분의 3 이상 찬성이 필요).

▲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이 9월 25일 무제한 토론 중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당시의 모습(국회방송 화면갈무리)
국회방송
지금처럼 여야가 서로 주고받으며 토론을 해야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법 7항에 따르면 토론 종결 사유는 두 가지로, ▲무제한 토론을 할 의원이 더 이상 없거나 ▲무제한 토론의 종결동의가 가결되는 경우이다. 다만 토론을 할 의원이 야당 쪽에 없더라도, 야당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여당이 찬성 토론에 나서기도 한다.
또 야당 측 토론이 도중에 끝나버리면, 그 즉시 의원들이 해당 안건에 대해 표결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대다수 의원들의 본회의장에 자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의결 정족수를 채우기 힘들다. 때문에 의원들이 모여 토론 종결 표결을 하게 될 24시간을 채우기 위해 민주당도 찬성 토론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안태준 의원도 <오마이뉴스> 통화에서 "당일 오전에 전화가 왔고, 갑자기 불려와서 준비도 못한 채 토론을 해야 했다"면서 "이게 필리버스터의 맹점인데, 중간에 토론을 종료하고 토론을 안 하겠다고 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안건을 표결해야 돼서 의원들이 회의장에 와야 된다"라고 말했다. 안 의원은 "(야당이) 정말로 필요해서 토론을 하는 거라면, 본인들이 그 의지도 좀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의원들은 불참하고 주호영 부의장은 사회도 거부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수분 없애려 증기 목욕? 기준 더 엄격한 미국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 필리버스터의 어원은 해적을 뜻하기도 하는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유래됐다. 미국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반대 과정에서 야당의 연설로 인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820년대부터 시작됐으며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영어 사전이기도 한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10월 2일 현재 기준, 필리버스터를 '해적(모험가)' 또는 '긴 연설 등 입법부의 행동 지연 전술'로 정의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무제한 토론에 있어 자리 이탈엔 더 엄격한 편이다. 미국 상원 필리버스터에서는 발언 중 화장실에 가거나 자리를 비우는 게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1957년 당시 공민권(인권법)에 반대해 24시간 18분 동안 연설했다는 스트롬 전 서몬드 상원의원이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당일 증기 목욕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법안 관련으로 내용을 제한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토론 내용에 제한이 없어, 동화책이나 독립선언서 등을 읽기도 한다.

▲ 5시간 넘게 무제한 토론,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라 즉석에서 연설해 화제가 됐던 1964년 4월 20일 당시 김대중 의원 모습. 다음날 조선일보 1면에 <개원 후 최대의 격돌>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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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김대중 당시 민주당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김준연 자민당 의원 구속동의안 저지를 위해 즉석에서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연설한 게 첫 필리버스터 사례로도 꼽힌다. 그러나 이후 폐지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과 함께 부활해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당시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당시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도 함께 참여, 192시간 26분 진행)로 다시금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의원들의 192시간 무제한 토론은 최장기 토론으로 기록되면서 국제적 관심을 받았다. 민주당 은수미 의원은 10시간18분 동안 발언해 당시 기준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억압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연설로 감동을 줘 시민들의 소액 후원이 2500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필리버스터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덜해졌고, 24시간 뒤 종결이 가능해지면서 지금처럼 여당 의석수가 압도적일 경우 무제한 토론이 진행돼도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10시간 18분' 필리버스터 마친 은수미의 '눈물' 2016년 2월 24일 당시,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처리를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에서 10시간 18분동안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을 진행 한 뒤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권우성
한편 '자기들이 먼저 신청해 놓고 토론엔 불참했다'는 비판에 대해 국민의힘은 지난달 30일 "식사도 하고 차도 한 잔 할 수 있고,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있을 수도 있다", "한순간의 모습만 가지고 비판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9월 30일 오전 YTN 라디오에 출연한 정성국 국민의힘 의원은 이같이 말하며 "(참여)조를 10명 정도로 짜서 돌아가고 있다. 이전과 20~30명 때와 달리 조가 10명밖에 안 되다 보니 하필 안 보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무제한 토론이 논란이 된 뒤 다수 석을 지닌 민주당에서는 법 개정을 준비 중이다. 신청 정당 의원들의 참석을 강제하는 등 구체적 장치를 갖추게 하거나, 반드시 의원들이 와서 표결해야만 하는 투표 절차를 전자식으로 바꾸자는 등의 논의가 오가고 있는 것. 송언석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지도부는 "필버는 소수당이 가진 마지막 호소 수단"이라며 "민주당이 이를 변질시키는 법안을 준비한다는데, 소수당 의견 배려 장치가 전부 사라질 것"이라며 맞섰다.
법 개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2016년 무제한 토론에 참여해 약 9시간 30분 간 발언했던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은 2일 <오마이뉴스> 통화에서 "국민의힘이 소수당이니까 일단 토론을 하고는 있는데, 자신들도 너무 관성적으로 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일부는 민주당 의원이 더 길게 말하는 등 모양새가 우스워졌다"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법의 애초 취지는, 몸싸움 같이 물리적 의사 방해가 아닌 합법적 의사 방해를 하라는 거다. 지금 여당이 다음엔 야당일 수도 있으니 법 개정엔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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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다녀오고 야당 불참해 여당이 대타까지, 논란의 4박5일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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