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봉평오일장에서 명필의 '명작'을 만나다

등록 2025.10.04 14:54수정 2025.10.04 14:5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봉평오일장 봉평오일장에 진열된 물건들
▲봉평오일장 봉평오일장에 진열된 물건들 김민수

오일장은 오래된 시간의 리듬이다.

도시에서 잊고 지내던 삶의 주기, 사흘과 나흘을 건너 다섯째 날이면 다시 열리는 약속 같은 일상. 강원 평창군 봉평오일장(2,7 오일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진열대도 상품도 아닌, 그 앞에 손으로 써 붙인 종이들이었다. 집게에 매달린 글씨들은 하나같이 제 주인을 닮아 있었다.


'햇곰취', '다래순', '자연산 고사리', '건취나물', '두충', '마가목', '오미자', '결명자'...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이름값을 자랑하는 들나물과 약초들. 하지만 그날은 이름보다 글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삐뚤빼뚤하거나, 기운차거나, 다정하거나, 촘촘하거나. 어쩐지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봉평오일장 약재에 대한 효능과 식용법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글씨가 참으로 정겹다.
▲봉평오일장 약재에 대한 효능과 식용법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글씨가 참으로 정겹다. 김민수

어느 한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초 (국내산) – 기침, 해열, 소화, 간기능 보조. 물 1리터에 5g을 넣고 끓여 드세요."

줄마다 다른 색으로 적힌 것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하지만, 그 글은 세세하게 읽게 되는 힘이 있다. 그 글을 읽고 나면 저것이야말로 내게 꼭 필요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시장통의 소리를 글로 옮겨놓은 듯했다. 삶의 시간이 담긴 레시피이자, 장터의 설명서였다.


봉평오일장 토종황기, 산당귀의 효능과 가격 모두 친절하다.
▲봉평오일장 토종황기, 산당귀의 효능과 가격 모두 친절하다. 김민수

그 글씨들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글씨란 원래 그런 거였지. 예쁘려고 있는 게 아니라, 말하려고 있는 거였지. 소통하려고 있는 거였지.'


장터의 글씨는 화려하지 않지만 정직했다.

한 획, 한 점마다 누군가의 산을 오른 발걸음, 뿌리를 캐는 손맛, 마르기 전에 뒤집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인쇄물이 아니라고. 이건 사람이라고. 상품보다 먼저 전해지는 건 바로 그 마음이었다.

메밀전 봉평오일장에 딱 어울리는 메밀전
▲메밀전 봉평오일장에 딱 어울리는 메밀전 김민수

나는 메밀전을 시켜놓고 오일장 좌판에 앉았다. 봉평 오일장의 주인공은 '메밀'이었다.

' 메밀베게', '메밀붕어빵', '메밀커피', '메밀차', '메밀식혜'...

가을 햇살이 맑은 나지막한 지붕 위 바구니에는 묵나물이 말라가고 있다. 평일이지만, 그래도 추석 명절 앞이라고 장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나왔다. 그럼에도 이것보다는 조금 더 붐볐더라면 상인도 손님도 더 신나는 장날이 아니었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다.

오일장에서 만난 물건들과 글씨와 음식, 더덕을 까다 졸음이 밀려와 한 손에는 더덕을 들고 꾸벅꾸벅 졸고계시는 할머니, 한껏 멋을 내고 친구들과 장날에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촌부들, 모두가 제자리에 있는 듯한 풍경들이다.

개미취 메밀꽃은 갔지만, 가을꽃들은 옂던히 아름답게 피어난다.
▲개미취 메밀꽃은 갔지만, 가을꽃들은 옂던히 아름답게 피어난다. 김민수

봉평 하면 메밀이지만, 메밀꽃의 계절은 가고 대신 가을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자잘한 흰 꽃송이들이 들길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문득 '동이'를 떠올렸다. 드라마 속 동이도, 책 속의 동이도 아닌, 삶 속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 같은 인물. 장터에서 글씨 쓰는 손, 나물 말리는 어깨, 꽃을 베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 그런 동이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삶을 어떻게 감싸 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사람.

도시의 글씨들은 목적이 분명하다.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소비를 유도하고, 클릭을 유도한다. 반면, 장터의 글씨는 목적보다는 삶에 가깝다. 한 끼를 팔기 위한 글씨이면서도, 생계를 이야기하는 글씨. 그리고 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작은 외침이다.

메밀꽃은 못 봤지만, 봉평 오일장에서 명필은 잔뜩 보고 돌아왔다. 누군가는 그저 종이 한 장에 적힌 안내문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삶의 문장'이라 부르고 싶다.

명필이 따로 있나. 살아 있는 글씨가 바로 명필이지.
덧붙이는 글 봉평 오일장은 2,7 오일장입니다.
본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10월 2일 오일장과 봉평 근처에서 담은 사진입니다.
#봉평오일장 #이효석 #메밀 #명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미국 산부인과 의사가 감탄한 자화상... 한국 작가 작품이라네요 미국 산부인과 의사가 감탄한 자화상... 한국 작가 작품이라네요
  2. 2 미군이 찍은 놀라운 모습...우리가 아는 한강이 아니다 미군이 찍은 놀라운 모습...우리가 아는 한강이 아니다
  3. 3 인천공항공사 노조 "보은인사 막히자 기자회견, 이학재 즉각 사퇴하라" 인천공항공사 노조 "보은인사 막히자 기자회견, 이학재 즉각 사퇴하라"
  4. 4 판교 호텔방이 동날 지경... 트럼프에 겁먹을 필요 없다 판교 호텔방이 동날 지경... 트럼프에 겁먹을 필요 없다
  5. 5 챗GPT 의존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 '아부에 속지 마라' 챗GPT 의존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 '아부에 속지 마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