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3월, 박문숙과 김병곤의 결혼식 장면
민청련동지회
가장 행복했던 단칸방 살이 4년
다행히 김병곤의 수감생활은 짧았다. 몇 달 감옥생활을 하고 석방돼 구속 전에 입사했던 회사에 복직했다.
김병곤과 결혼을 약속한 문숙은 예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81년 3월, 마침내 김병곤과 박문숙은 서울대 상대 은사이신 변형윤 교수를 모시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남영동에 신혼방을 얻고 82년엔 맏딸 희진을, 84년엔 둘째 딸 은희를 얻었다. 김병곤은 회사원으로 문숙은 두 아이의 엄마로, 두 사람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4년. 그 평화가 그토록 짧으리라고는 두 사람은 물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83년 어느 가을날, 남영동 셋방에 김근태 선배가 찾아왔다. 연탄불로 따뜻해진 단칸방 한구석엔 기저귀가 널려있고, 아랫목 이불 속엔 둘째 은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광경에 김근태는 가슴이 뻐근했다고 한다. 창립 준비를 하고 있는 공개 청년운동단체에 김병곤과 함께 하자고, 보나마나 한 가시밭길을 권하러 찾아온 참이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를 들으며 문숙은 어땠을까. 청년운동단체 투신이 그렇게 흔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결정을 존중했던 문숙은 조용조용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생활 방편을 물색했다.
1983년 9월 30일 민청련이 창립되고 조직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김병곤은 일단 회사를 다니면서 비공개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청년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민청련 조직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회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시내 곳곳에 있는 고층건물에 올라가 플래카드를 펼치고 선전물을 뿌렸다. 기습적인 가두시위가 장소를 바꿔가며 거의 매일 열렸고 덩달아 민청련 아내들도 분주해졌다.
생업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는 남편 옆에서 문숙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서울 망원동에 농민과 소비자 직거래 장터를 열어 무농약 쌀과 곡물을 취급했다. 그리고 인재근, 김설이, 조명자, 이기연, 최정순 등 민청련 활동가의 아내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판매하는 쌀 포대를 들고 김희택의 망원동 집을 찾기도 하고, 이범영이 청계천 고가도로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서로 잡혀가자 아내 김설이를 찾아가 함께 할 정도로 민청련 가족들과 가깝게 지냈다.
민청련 여자들, 탄압의 방패막이로 나서다
85년 5월 서울대를 비롯한 5개 대학 73명이 미문화원 점거농성사태가 터졌다. 광주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한 미국은 사과하고 군부독재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는 요구를 걸고 말이다. 곧 학생운동권과 민주운동단체를 향한 독재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이 몰아쳤다.
탄압정국에 대항하기 위해 민청련은 긴급하게 학생운동권과 연대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민청련 대표로 김병곤과 이범영이,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대표로 황인하가 나서 논의를 이끌었다.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체포. 85년 7월 18일 김병곤과 황인하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문숙은 아이들은 큰시누에게 맡기고 변호사 선임하랴, 경찰서 쫒아가 면회요구 투쟁하랴, 정신이 없었다. 용산경찰서 면회실에서 마침내 남편 김병곤을 마주했다. 고문은 안 당했냐? 몸은 어떠냐? 남편의 안위부터 확인하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이 발이 불편했는지 자꾸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했다. 그러다 눈치챘다. 문숙이 재빨리 운동화 끈을 매는 척 엎드렸더니 과연, 남편 신발 바닥에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다음 타깃은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이다. 빨리 대비하라."
예상했던 대로 민청련 탄압이 몰아쳤다. 85년 9월 4일, 김근태 의장은 유언비어 혐의로 구류 10일을 살고 풀려나는 마지막 날 새벽,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김근태가 끌려가기 직전 9월 2일엔 일단 도피했다가 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집에 잠시 들른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안기부로 연행됐다. 이어서 민청련 집행부가 초토화됐다. 남아있던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거나 수배됐다.
급박했다. 9월 5일 가족들과 회원들이 서울 중국 삼각동의 민청련 사무실에서 구속된 김병곤, 불법 연행된 김근태와 이을호를 즉각 석방하라는 구호를 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9월 8일, 수사기관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출입문에 X자 각목을 치고 대못을 박았다.

▲ 1985년 10월 15일, 서울 중국 삼각동의 민청련 사무실에서 민청련 탄압에 대한 항의농성. 왼쪽부터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박문숙 인재근.
민청련동지회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문숙은 커봤자 3살짜리 희진이, 돌 지난 지 몇 달 안 된 둘째 은희 이것들을 맡길 데가 없으면 업고, 끌면서 면회를 다니고 항의농성에 합세했다. 때로는 구속자들이 끌려간 수사기관을 찾아 석방하라고 항의하다가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에 내팽개쳐지기도 했다.
어찌 문숙이뿐일까. 수배령이 떨어진 이범영의 아내 김설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형사들이 집에 쳐들어와 젖병 빠는 아이와 배가 남산만 한 산모를 앞에 두고 한 대 칠듯한 살벌한 어조로 이범영 어디 숨었냐고 협박을 해대고 세간살이를 뒤집어놨다. 오죽하면 두 돌도 안 된 건혜가 형사만 보면 눈을 부릅뜨고 입을 삐죽댔을까.
둘째가 만삭인 이을호의 아내 최정순은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남편 이을호를 석방시키기 위해 수사기관, 종교단체를 울며불며 찾아다녔다. 다른 집들도 다 고만고만해 한두 살짜리 기저귀 차고 젖 먹는 아이들을 누구한테 맡기냐가 매일매일 고민이었다. 문숙이도 예전 조그맣게 운영하던 망원동 쌀집을 처분한 뒤 민청련 가족들의 대열에 합세했다.
85년 12월 12일, 민청련 여자들의 주도로 학생, 노동, 농민 등 각 부문 운동의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 민가협 초대 총무는 인재근이 맡았고 문숙은 재정부장을 맡았다. 경찰서로, 교도소로, 농성장으로 매일 매일이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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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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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잡혀가자 여자들이 나타났다, 민청련 여자 박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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