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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앞에 놓인 낯선 봉지...메모 보는 순간 울컥

이웃이 정성스레 챙겨준 추석 음식

등록 2025.10.10 06:44수정 2025.10.10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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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편
송편 pixabay

창밖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올해 유난히 길어진 추석연휴는 그 빗물에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가족을 캐나다에 두고 한국에 들어온 지 8년, 그새 나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어머니의 간병이라는 끈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만, 이제 그 온기마저 요양원의 병실에 갇혀버렸다.

어머니는 낯선 천장만 바라보고 계실 테고, 나는 텅 빈 집안에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만 하염없이 서성였다. 홀로 보내는 명절이 하루이틀은 아니지만,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지시는 어머니를 면회하고 온 터라 마음의 공허가 유난히 깊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내려 놓았다고 생각했건만, 이 유리 조각 같은 쓸쓸함은 여전히 나를 베고 있었다.


이 공허를 메우려 미뤄두었던 집안 대청소를 벌였다. 가을 옷을 꺼내 개고, 겨울 이불을 꺼낸다. 몸을 움직이면서 마음의 어수선함도 정리되기를 바랐다. 분리수거를 위해 현관문을 나섰을 때였다. 문 앞에 놓인 낯선 봉지 하나. "뭐지? 누가 갖다 놓았지?" 의아함에 봉지를 열어보니, 김이 채 식지 않은 송편과 전, 잡채까지 소담하게 담겨 있다. 그 봉지 위에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별 맛은 없지만, 마음으로 함께 명절 지내요!

나는 이 짧은 한 줄을 마치 오래된 암호라도 해독하듯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명절의 서러움은 순식간에 따뜻한 위안으로 바뀌었다.

집 앞에 놓인 봉투

요즘은 돈만 있으면 어떤 음식이라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웃이 정성스레 지지고 볶아 마음까지 살뜰히 챙겨주는 집밥은 그 어떤 고급 식당의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 넘어져 무릎 까진 서러움을 어머니가 '호호' 불어주면 눈물이 더 나듯이, 이 작은 선물은 내 안의 응어리를 터뜨리며 코끝까지 찡하게 만들었다.


송편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아직 따뜻하다. 서둘러 가져다 준 게 분명하다. 떡의 온기가 입안에 퍼진다. 나의 외로움을 인지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함께 하겠다는 '정'의 충격이 스며들었다. 이웃은 나에게 송편을 건넨 것이 아니라, 텅 비었던 추석의 온기를 나누어 준 것이다.

음식을 가져다 준 그녀는 평소에도 마음 넉넉한 이웃이다. 집 수도가 새던 날, 어떤 업체에 전화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 명함을 건네주었다. "여기 괜찮아요, 바가지 안 씌워요."


쓰레기 배출일을 헷갈려 할 때도, 골목 어귀에서 마주치면 알려주었다. "내일은 플라스틱 아니에요, 모레요."

가끔 차 한잔을 나누며 적적한 생활에 많은 위안을 주었다. 그녀의 나눔은 거창하거나 멀리서 이루어지는 봉사활동이 아니었다. 그저 '곁을 돌아보는 작은 관심'이었다.

모두들 앞만 보며 달려가기 바쁜 세상, 옆을 돌아볼 여유를 찾기 힘들어 세상이 각박해져 간다지만, 어머니가 평생 사신 이 오래된 골목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고기잡이가 갈대를 꺾지 않는' 조심스러운 배려처럼, 나의 아픔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나눔은 멀리 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내 주변의 외로움을 인지하고 작은 친절을 실천하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이웃은 나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건넸고, 나는 텅 빈 명절을 버텨낼 활력을 얻었다.

고독을 알아보는 눈

골목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8년 전, 새벽 비행기에서 내려 어머니 곁으로 달려갔을 때, 나는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내 삶, 내 일상, 내가 쌓아온 것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얻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의 고독을 알아보는 눈.

어머니를 혼자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안타까움, 명절마다 텅 빈 식탁 앞에 앉았던 쓸쓸함, 생일날 케이크의 촛불 없이 혼자 먹던 저녁들. 그 모든 고요하고 앙상했던 시간이 나를 무뎌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민하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타인의 빈자리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골목 어귀에 햇볕을 등지고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저녁 무렵이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이웃이 보인다. 편의점에서 혼자 김밥을 계산하는 젊은이의 고립된 뒷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섬에 살고 있지만, 가끔 작은 배를 띄워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 송편 한 접시가, 택배 기사님께 건네는 따스한 차 한 잔이, 이웃 할머니에게 먼저 여쭙는 안부 한 마디가 그 작은 배가 될 수 있다.

푸근한 미소, 따스한 말 한마디, 작은 친절 하나가 누군가의 쇠잔해진 마음에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미세한 불꽃을 선사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골목이 보인다. 낡은 집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좁은 동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 외로움도 서로 마주 보게 되면,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추석이 지나간다. 밤 사이 비는 그쳤고, 하늘은 맑다.
그리고 삶은, 이어진다. 함께.
덧붙이는 글 제가 경험한 소박하고 작은 나눔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웃의 작은 정성은 누군가에게 소박하지만 단단한 위로를 건넬수 있음을 깨닫고, 모두와 함께 이어달리기를 할 수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 #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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