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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글로 정리하고 싶다'는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한가지

고맥락 언어로 관계를 쌓는 일

등록 2025.10.10 17:34수정 2025.10.1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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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제목으로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에서 있던 일을 연재하고 있어요.[기자말]
"선생님, 저는 글 쓸 줄 몰라요."

수업 초반, 어르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시는 말씀이다. 젊을 때 일기 써본 적이 있다, 정도가 글쓰기 경험의 최대치다. 몇 번 겪어보니 글을 '모른다'는 건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란 걸 알게 됐다.


지난 수업시간, 한 어르신이 들어오시며 "도배하느라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 쓰겠어요." 하셨다. 평소에는 잘 쓰시던 분이었다. 이 한 마디에서 나는 이미 몇 편의 글을 보지만 끌어내기 위한 단계가 있다. 한 문장에 들어있는 여러 계절을 차분히 꺼내는 일이다.

왜 도배를 하셨냐는 내 질문 하나에 이야기가 열렸다. 위층에서 물이 새어 천장부터 벽까지 얼룩이 생겼다. 그게 벌써 몇 년째인데 어차피 어르신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고 사셨다고.

"그런데 왜 이번주는 그러려니가 안 됐어요?"
"외국 사는 딸래미가 온다하니 벽지가 밟히잖아요."

그 말에는 설렘과 미안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고맥락 언어를 수업에 이용하는 법


한국어는 고맥락 언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밥은 먹고 다니니?"라고 물었다고 하자. 영어라면 "Are you eating well?"이나 "Have you been eating?"으로 직역되지만,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잘 지내니? 건강하니? 힘든 일은 없니?'다.

한국어는 문장 그대로보다 맥락과 관계, 상황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밥 먹었어?"는 인사이고, "우리 밥 한번 먹자"는 만남의 제안이며, "밥값은 한다"는 능력의 인정이다.


영어가 명시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한국어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 침묵의 문법이다. 말줄임표 사이의 진심을 읽어야 하는, 어찌보면 피곤한 언어이긴 하다. 같은 단어도 누가, 언제, 어떤 관계에서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 이것이 고맥락 언어의 특징이다. 이런 특성을 시니어 글쓰기 수업에서 이용하려면 질문이 필수다.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단순한 한 마디가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작이 된다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단순한 한 마디가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작이 된다 픽사베이

고맥락을 이용한 질문 유형

첫 번째는 사실 질문이다. "누수가 심했어요?" "언제부터였어요?" 구체적 상황을 여는 질문이다. 이때 중요한 건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왜 진작 안 하셨어요?"가 아니라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로 묻는다.

두 번째는 감정 질문이다. "제일 힘든 게 뭐였어요?" "혼자 하셨어요?" 등이 필요하다. 한국말의 특성상 감정은 직접 말하지 않고 상황 속에 숨긴다. '힘들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 분노, 체념을 구분해야 한다.

세 번째는 의미 질문이다. "그런데 왜 이번 주는 그러려니가 안 됐어요?" 이 질문이 핵심이다. 행동의 이유를 물으면 가치가 드러난다. "딸애가 오는데"라는 대답 속에 모성이, 자존심이, 사랑이 들어 있다.

마지막은 공감 질문이다. "제가 도배할 때는 자잘한 살림이 많아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어르신은 어떠셨어요?"라고 되묻는다. 공감은 질문보다 강하다. 누군가 내 경험을 안다는 것, 그게 입을 연다.

질문은 삽질이 아니라 고고학이다. 무작정 파서 채굴하는 게 아니라 조심스레 채집해야 한다.

내가 하는 채집은 실시간 타이핑이다.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타이핑했더니 1000자짜리 글이 됐다. ​​​​​​​​​​​​​​​​대답했을 뿐인데 글이 되는 모습을 본 어르신들은 글쓰기를 한층 가깝게 여긴다. 그게 이 수업의 본질이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다.관계다. 마음이 통하면, 글은 저절로 열린다.그러니 내 이야기를 푸는 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먼저다. 신뢰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문장의 뿌리가 깊어진다.

글쓰기는 마음을 꺼내는 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니어 글쓰기 수업은 점점 달라진다. 처음엔 단문으로만 써도 괜찮다고 하던 분들이, 어느새 장문의 이야기를 쓴다. 누군가는 젊은 날의 첫사랑을, 누군가는 자식에게 하지 못한 말을, 또 누군가는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공허함을 글로 남긴다.글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기억을 다독이며,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어르신의 82%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글을 써본 사람은 12%에 불과하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잘 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꺼내는 일이다.그 마음을 꺼내기 위해 필요한 건 문법이 아니라 관계다. 관계가 익을수록 문장은 깊어진다.

한 문장으로 시작해도 된다. 한 문장이 모이면 한 편의 글이 된다. 한 편의 글이 쌓이면, 인생이 보인다. 그렇게 또 한 편의 글이 태어난다. 짧은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시니어글쓰기 #복지관글쓰기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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