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기사문 중 일부 최근 5년 초중고생 자살시도,자해 추이
경향신문
"서울을 보면 자살시도 학생은 2021년 180명에서 2024년 677명으로 꾸준히 늘어나 3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했다. 경기의 자살시도 학생 수도 2021년 179명에서 2024년 646명으로 늘었다. 전남에선 자살시도·자해를 한 학생이 2021년 229명에서 지난해 564명까지 증가했다."
- 2025년 10월 13일자 <경향신문> "하루 20명, 오늘도 한 반이 벼랑끝에···학생 자살·자해 시도에 무관심한 어른들"
나이를 불문하고 자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기로 볼 수 있는 청소년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증가하는 현상은 교육제도만 바꿔서는 충분히 막기 어렵다. 사교육비 지출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이고,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내면은 점점 소진되고 있다. 수면이 줄고, 자율 시간이 사라지고, 성취가 숫자로만 환원될 때 마음은 말라간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것들이 너무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비인간성이 만연한 사회라는 점은 자살률이 보여주고 있다. OECD 국가 자살률 통계에서도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속해왔다. 우리나라는 결코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라다.
13일 <경향신문>의 기사 내용은 청소년 자살 및 자해 실태를 최대한 밀착해서 수치로 보여줬고, 동시에 교실 설문조사의 한계를 인정했다. 또한 학교가 근본적 해결보다는 실태 파악과 '예방'이란 명목으로 책임을 회피한다는 지적도 담고 있다.
그러나 학교의 입장도 이해된다. 아이들의 자살시도와 자해의 원인을 학교 시스템에만 돌리는 태도 역시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폭발적 성장기인 청소년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우리는 더 진지하고 복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나는 초등학생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린 시절 나를 양육한 부모의 입장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베이비부머 세대였던 부모님은 남들보다 더 잘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에서 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 안에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70여 명이라는 학생들이 바글거렸고 한 학년에 반이 열 개는 족히 넘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흔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남들보다 못하거나 중간 이하로 떨어지면 '열등아'로 낙인이 찍히곤 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무서운 체벌이 '열등한'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독재와 폭력이 당시의 학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환경 탓에 공부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어쩌면 남들을 내 발 아래 두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게 비인간적인 치열함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은 '가난'이 있었다.
베이비부머가 한창 자라던 시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로 급격히 전환되던 때였지만, 두 체제가 매끄럽게 공존하지는 못했다. 산업화가 새로운 주인처럼 갑자기 군림하듯 밀고 들어왔고,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오직 가난에서 벗어나 배부르고 등 따숩게 해주는 지도자에 환호했다. 산업화의 흐름에 발맞춰 '진보한 인간'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 위치를 꿈꿨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자살률이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에 과도하게 의존해왔고, 생명을 경시하는 불건전한 사상이 산업화 시대에 뿌리내렸음을 보여준 위기의 시절이었다.
물론 대부분 가난했던 부모님 세대에게 돈과 신분 상승을 위한 도전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폐단은 심각했다. 자살률은 이후로도 높은 수준을 이어갔고, 2003년 이후 우리나라는 OECD 안에서 상위권을 지속해왔다. 실패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국민의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러한 배경은 현재 청소년의 자해·자살률의 증가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결혼과 출산률이 급감하여 인구 절벽이라는 초위기 상황을 초래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회는 결국 쇠약해지는 사회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 대개혁을 외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꿈은 사치가 되고, 결혼과 출산도 선뜻 도전하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비참함마저 느낀다.
얼마 전 '당근' 앱에 어떤 고1 학생이 글을 올렸다. "중간고사 영어 성적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희망이 안 생긴다. 대학 못 가면 인생 망하나?"라는 고민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심리 상태가 거의 심리적 자해 수준이라고 느꼈다. 그 글에는 7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다들 성인으로서 저마다 한마디씩 답했다.
"영어 못한다고 대학에 못 들어가는 건 아니다. 영어 공부는 수준에 맞는 방법을 찾으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
"대학을 안 가도 재능과 꿈이 있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특출한 점이 없다면 대학에 가는 것이 좋다."
"인서울 대학 나온 저와 제 친구들이 특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좋은 대학 나올수록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반면, 그렇지 않으면 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졸자는 고졸자들과 어울리고, 대졸자는 대졸자들과 어울린다."
이 고민글과 답변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망한 인생'과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을 자주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으로 누적되는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이며, 생명력을 감소시키는 주요 원인임은 분명하다.

▲댓글1 대학에 대한 생각을 댓글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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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대학에 대한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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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시험과 입시 불안 70여개의 댓글이 달렸던 고1 학생의 고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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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다양한 댓글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정신을 차렸다, 시험공부 잘 하겠다"라며 감사의 답글을 달았다. 그 댓글을 본 나는 내심 안도했다.
아이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이미 많은 어른들의 가치관은 '어려움 없이, 부족함 없이, 스마트하게' 사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반면 어리고 약한 생명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제도와 법에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의 사고방식을 살펴야 한다. 사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가치관이 주변인들과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준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주입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악순환의 쳇바퀴가 끝없이 굴러가게 될 것 같다.
함께 울고 웃는 사회,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사회, 다음 세대가 살맛 나는 사회가 되려면, 어른들부터 절대시 해온 행복의 기준을 조금 느슨하게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남들보다 좀 못나면 어떤가. 좀 뒤처지면 어떤가?" 우리 아이가 좀 뛰어나지 않으면 어떤가? 영어를 좀 못하면 어떤가? 우리 집이 남들보다 좀 부족하면 어떤가? 성장기의 아이들이 숨통 트이는 미래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사회에 또 있을 수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지금 당장 내려놓아야 할 개인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할 수 있다. 오늘 단 하루라도 '비교 금지 시간'을 만들고, 성적 대신 노력·회복·친절을 칭찬하며, 실패를 '연습의 데이터'로 여기자. 제도는 느리지만, 아이의 호흡은 지금 여기서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조금 덜 뛰어나도, 더 오래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생명력이 다시 한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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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피부관리사, 피부 심신 회복 전문 아로마 테라피스트. '느리미'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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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못 가면 인생 망하나?" 17살 학생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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