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9월,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에서 서산개척단 피해자 정영철·이정남씨와 새마을지도자, 면장과 면담 중인 최동묵 시의원
서산시대
"19살에 잡혀와서 배고파가면서 폭행당해가면서 청춘을 바친 땅인데, 박정희 때 노역의 대가로 분배받은 땅을 전두환 때 빼앗겼다."
지난 13일 서산개척단 피해자이자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정영철씨(82)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문장마다 지난 세월의 고통이 묻어났다.
그는 서산 인지면 모월리 간척지 한가운데서 60년의 세월을 떠올렸다.
"무단 점유했다는 이유로 임대료를 내라고 했다. 나중에는 '필요하면 돈을 내고 사라'고 했고, 지금도 그 땅값을 갚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판결은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이지만, 당시 강제노역의 대가로 분배받았던 농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인정한 60년 만의 책임
'서산개척단 사건'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1961년부터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간척지에 무고한 청년들과 부녀자들을 강제 동원해 노역과 결혼을 시킨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감금과 폭행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겪었고, 이 과정에서 다수가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는 2021년 5월, 이 사건을 조사하며 "국가권력이 자행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정부에 공식 사과와 배상을 권고했다.
이를 근거로 대한법률구조공단은 피해자와 유족 112명을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법원은 총 118억 원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은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이를 반박할 자료가 없다"며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또 "집단 희생이나 인권침해 사건은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법률구조공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배상액은 입소 기간 하루당 15만∼20만 원으로 산정됐으며, 일부 사망 사건은 별도 금액이 추가로 인정됐다.
감춰진 고통, 드러내기까지의 두려움
정 위원장은 "당시 폭행으로 귀도 잘 안 들리고 치아도 빠졌지만, 이 일을 추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개척단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국가가 잘못했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며 버텼다"며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말 속에는 단순한 분노보다, 오랜 세월 사회의 시선에 눌려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의 상처가 스며 있었다.
서산개척단이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국가폭력의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누구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우리가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조사도 고통이었다… 2차 가해의 기억"
그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받던 때를 "또 다른 시련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조사받는 과정도 참 힘들었다. 자녀 세대에게 부모가 겪은 참혹한 일을 다시 들춰 알려주는 일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는 "그래서 내가 대신 참고인으로 나서야 할 때도 있었고, 조사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아팠다"고 말했다.
당시 일부 피해자들은 고령으로 직접 진술하기 어려워 자녀 세대가 대신 나섰다. 그러나 부모의 고통을 다시 증언해야 하는 과정은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았다.
정 위원장은 "이런 조사조차 누군가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방의회, 잊힌 사건의 제도화에 앞장
충남도의회와 서산시의회는 각각 2022년과 2023년, 서산개척단 진실규명 및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특히 서산시의회는 최동묵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서산개척단 피해자 명예 회복 및 배·보상 촉구 결의안'(2023년 4월)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지방정부 차원의 대응에 나섰다.
최 의원은 "현재 서산에 거주하는 개척단 어르신은 15명뿐이다.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실질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지면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들었던 그분들의 고통이 늘 마음에 남았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고 말했다.
이연희 충남도의원도 2023년 7월 도의회 본회의에서 "서산개척단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이자 국가폭력의 상징"이라며 충남도의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한 바 있다.
늦은 정의, 끝내 밝혀야 할 진실
정 위원장은 "이번 판결은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일 뿐,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가 강제로 일한 땅, 그 대가를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60년 동안 이 땅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때 흙을 밟던 손과 발은 다 늙었지만, 아직도 그 흙에 묻은 억울함은 남아 있다."
이에 서산시대는 향후 이 사건의 농지분배 문제를 중심으로, '인권'에서 '재산권 회복'으로 이어지는 후속 과정을 지속적으로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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