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불신이 짙게 깔려있다. 특히 12.3 내란 이후 '조희대 대법원 대선 개입 의혹', '세관 마약 사건 외압 의혹' 등 국민적 사안마다 더욱 그러하다. 다수의 시민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생각이 다른 상대는 아예 적으로 대한다. 신뢰는 오히려 사치인 듯 말이다. 책임 있는 정치인, 지식인, 언론은 한술 더 떠 거짓 선동마저 일삼는다.
저런 꼴을 보고 있으면 문뜩 유신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나? 서글픔이 밀려온다. 물론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근거하여 가치와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의 다양한 무늬는 존중돼야 마땅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적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런 경우 해당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묵은 질문, 박정희는 왜 유신을 해야 했을까?
지금 '박정희는 왜 유신을 해야 했을까?' 묻는 것은 어쩌면 해묵어 보이겠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다. 박정희 추종자는 물론이고 반대편에 서 있는 시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특정 세계관에 근거한 가치와 태도는 다시 현실 인식과 미래 전망에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의 유신 선언은 '안보위기' 대응 혹은/과 '종신 집권' 욕망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의 국민은 진실보다는 정치적 이유로 호불호를 달리하고 그 선택을 신념화했다. 게다가 그 신념은 줄곧 선악의 사회적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 작금의 범위와 차원을 가리지 않는 병리적 아노미 현상의 주요 뿌리를 유신에서 찾는 이유다.
박정희는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과 1972년 2월 중미 화해를 미국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이며 동아시아 냉전 구조의 해체로 이해했다. 한국은 더는 동서 대결의 '최전선'이 아니게 된 것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은 박정희의 그러한 인식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그와 김일성은 속내야 어떻든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1970년대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달성하자"라는 선언적 대의에 공감했다.
하지만 냉전 구조의 해체와 남북대화 진전은 박정희에게 심각한 '딜레마'로 작용했다. 그는 동아시아질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1971년 12월 6일 북한 위협을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엉뚱하게도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의 통일 열망을 부추겼다.
박정희가 그처럼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남북대화가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취약한 정권을 유지한 핵심적 수단은 냉전 이념과 북한 위협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박정희의 본능적 의심이었다. 그는 미국의 한국공약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흥정 과정에서 한국과 자신이 희생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는 미국이 대만을 '제물'로 삼고, 베트남을 '포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는 미국이 북한을 남한과 동등하게 대하고 유엔사령부를 해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박정희로서는 정권의 불안정 및 미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을 앞에 놓고 모종의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유신이었다.
'통일' 명분 뒤에 숨겨진 종신 집권의 그림자
그런데 박정희의 유신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자신과 정권을 민족 혹은 국가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것을 국가와 민족이 살길이라 생각했다. 추종자들 또한 박정희만이 민족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지도자라 믿었다.
둘째, 박정희는 남북대화 과정에서 일사불란한 북한체제가 매우 효율적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는 1967년 대선에서 부정을 저질렀고, 1971년 대선 때도 온갖 부정 수단을 동원했으나 힘겹게 이겼다. 그래서 박정희는 이후 "선거를 치르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 조건에서 만약 통일 논의가 본격화되면 국론통일은커녕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것이 뻔했다.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정권을 유지하려면 선거제도를 바꾸어 종신대통령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마침내 박정희는 '평화통일'을 명분으로 종신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유신을 발표하기 수일 전 기존의 남한 헌법이 "반공산주의 원칙을 담고 있어 남북대화를 받아들 수 없다"라며 "대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 유신을 단행할 것이라고 북한에 통보해 주었다.
미국에는 발표 23시간 전에야 설명해 주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미국을 믿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역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막을 수 없었다.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0월 유신은 박정희와 추종자들이 종신 독재체제 구축을 위해 헌법을 짓밟은 친위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그릇된 신념, 관성적 독재, 그리고 정권위기 가능성이 불러낸 지극히 사적이고 파당적인 야욕의 산물이었다는 말이다.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심성에 사로잡혀 민족과 국가를 들먹이며 거짓 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스른' 박정희의 기만과 위선과 탐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비극적 종말'의 복선(伏線)에서 교훈을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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