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조별묘에서 내려다 본 광동 진씨 집성촌 황조 마을의 평온한 풍경. 공교롭게도 마을이 서향인데, 처음 터를 잡을 때 그들의 뿌리인 중국을 잊지 않기 위한 의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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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 마을. 그런데 이 마을을 두고 최근 '전국에서 짜장면집이 없는 유일한 중국인 동네'라는 멸칭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촌 마을에 별명이 생기고, 지역 사회 안팎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최근의 '혐중' 분위기 탓이다.
황조마을은 광동 진씨의 집성촌이다. 정유재란 당시 원군으로 참전한 명의 장수 진린의 후손들이 건너와 정착한 마을이다. 명이 청에 멸망 당하자,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가 조선에 망명한 게 시초다. 진린을 시조로 하여, 이들의 고향인 광동(현 중국 광동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전제해 둘 게 있다. 그곳은 '중국인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중국인을 시조로 한 '한국인이 사는 마을'이다. 그것도 400여 년 전 외침을 받은 우리를 도와 목숨 걸고 싸운 중국 장수를 시조로 삼고 있으니, 조롱과 멸시를 당할 이유가 하등 없으려니와 되레 기려야 마땅하다.
이순신과 진린
참고로, 진린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진린의 후손인 광동 진씨가 이순신의 후손인 덕수 이씨와 지금까지 가문 간의 교류를 이어오고 있는 이유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남해 고속도로 방향으로 접어들면 남도의 젖줄 영산강을 건넌다. 하굿둑에 가로 막힌 강은 호수가 됐고 바다처럼 넓다. 그래서 영산강이 아닌 영산호다. 서영암 나들목에서 남녘으로 핸들을 돌리면 햇볕과 바람과 물과 들이 교차하는 풍광이 펼쳐진다.
지난 2022년 개통된 솔라시도 대교를 지나면 곧장 황조 마을이다. 다리의 이름이 앙증맞다. 자연 친화적인 첨단 도시 건설을 표방하며 해남군 산이면과 영암군 삼호읍을 잇고 있다. 태양을 뜻하는 라틴어 'SOLA'와 바다를 뜻하는 영어 'SEA', 도시의 'DO'를 이어 붙인 명명이다.
마을 초입엔 진린 장군의 신도비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황조 마을의 표지석 노릇을 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이 조금 특이하다 싶더니, 여기 와서야 그 의미를 알겠다. 황조(皇朝)는 황제의 조정, 곧 명나라를 상징한다. 명나라의 유민들이 건너와 정착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 황조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명나라 장수 진린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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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를 지나면 마을의 한가운데에 '황조별묘(皇朝別廟)'라는 이름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의 가장 높은 곳인 데다 성벽 같은 석축 위에 놓여 마을 어디서나 눈에 띈다. 광동 진씨의 시조로 삼는 진린과 후손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곳이다.
특별한 사당이라는 뜻의 '별묘'에 마을 사람들의 웅숭 깊은 애정과 자긍심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부터 근래까지 중건과 증축을 계속해 오면서 규모가 커졌고, 마을의 터줏대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재 해남군의 향토 문화유적 제 1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사당의 입구엔 중국어로 쓰인 큼지막한 환영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진린의 고향인 광동성 운안구 인민 정부와 진린 문화연구 협회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중국어 아래로 번역된 한글이 적혀 있고, 양옆으론 태극기와 중국의 오성홍기를 교차한 문양을 그려 넣었다.

▲ 황조별묘 입구에 내걸린 중국인 관광객 환영 현수막. 다녀간 뒤인데도 현수막을 그대로 달아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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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에 사는 진린의 후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 외딴 마을을 방문한 모양이다. 광동성 운안구와 해남군은 진린을 매개로 지난 1999년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이후 격년에 한 번씩 한식날을 즈음해서 중국인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한중 외교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지난 정부에서도 이들의 방문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지난 2023년에는 우호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공동 지역 발전에 협력한다는 내용의 협약식을 열기도 했다. 당시 중국 방문단은 이틀 일정으로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 등을 탐방했다.
상호 방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 도시 간 교류가 이어지자, 황조 마을은 한중 우호 협력의 상징이 됐다. 주한 중국대사를 역임한 추궈홍과 싱하이밍 등이 직접 방문해 유명세를 치렀다. 2014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우호의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소담한 솟을대문을 지나면 어른 키 높이의 담장 안에 사당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을 배향하는 곳이지만 중국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맞배지붕 집이다. 사당을 감싸안은 울창한 대숲에서 되레 토속적 정취가 물씬 난다.

▲ 사당 앞에 세워둔 '한중 우의, 진린 장군'을 새긴 표지석. 태극기와 중국의 오성홍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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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중국 것을 찾는다면, 태극기와 오성홍기를 나란히 새겨 사당 앞에 세워 놓은 표지석이다. 양국 국기 아래로 '한중 우의 진린 장군'이라는 한자를 적어 놓았다. 이곳의 의미와 상징성을 대표한다. 사당 안 제대 위에도 진린 장군상, 영정, 위패와 함께 양국 국기가 놓여 있다.
진린은 중국인이지만, 이곳을 자신들의 뿌리 삼아 정성껏 가꾸는 이들은 한국인이다. 시조와 후손의 관계를 지금의 국적으로 가르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적어도 이곳에선 마을 주민과 격년에 한 번씩 찾아와 제사를 모시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 같은 사이다.
혐오가 범람하는 시대, 이 마을을 생각하다
그들에겐 '혐한'도 '혐중'도 낯선 단어다. 황조 마을 주민들은 중국을 향한 혐오 표현을 TV나 인터넷을 통해 얼핏 전해 들었을뿐더러 지금껏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여겼다. 그저 오며 가며 이웃사촌처럼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내비칠 따름이다.
방문단이 떠난 뒤에도 현수막을 내리지 않는 마음이 애틋하게 전해온다. 고향에 내려와 명절을 쇠고 귀경한 자녀와 손주들을 그리워하는 촌로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과연 온갖 혐오 발언을 쏟아내며 오성홍기를 찢어발기는 광장의 악다구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도 언론마다 중국인 관광객들의 추태와 '혐중' 시위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야당에선 중국인 관광객 무비자 입국으로 전염병 확산과 범죄가 우려된다는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가 하면, 이른바 '중국인 3대 쇼핑 방지법'을 추진하며 중국 혐오 여론을 마구 선동하고 있다. 국내 건강보험과 선거권, 부동산 거래에서 중국인이 과도한 혜택을 받는다는 주장이다(관련 기사 :
또 '혐중' 선동하는 국힘..."무비자 입국 중국인 정체가 궁금하다").
여당은 이를 명백한 가짜 뉴스로 규정하며 반박하고 있지만,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사실인 양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혐중'이라면 모든 게 수용되는 상황이다. 혐오가 범람하는 무서운 시대다.

▲ 사당 내 제대에는 진린 장군의 작은 동상과 영정, 위패가 놓여 있다. 그 옆에 설치된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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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조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혈육보다 가까운 사이였어요. 제문을 지어 올리고 운구 행렬을 따라 충청도 아산까지 갔을 정도니까요."
마을 초입에서 사당까지 길을 안내해 준 촌로는 이순신의 '절친'인 진린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중 양국의 외교 갈등 속에서도 황조 마을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그에게 한중 관계란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황조 마을을 나오며 다짐한 게 있다. 내년 소풍 때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겠다는 것. 신도비와 사당을 답사하고, 광동 진씨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볼 작정이다. 당장 비산비야의 안온한 마을 풍광에 온갖 혐오와 반목이 눈 녹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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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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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절친' 후손마을도 혐중? 마을 어르신들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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