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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10.16 13:40수정 2025.10.16 13:40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날의 긴 폭염이 지나기를 고대했다. 더위가 한풀 꺾이던 날, 빙그레 웃음이 나온 것은 계절을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순리가 대단해서다. 아, 기어이 가을이 오려나 보다. 노란 단풍이 너울거리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허공을 맴돌던 가을인가 했다. 고대하던 가을이 오려는데 반은 반갑고, 반은 언짢았다. 올해도 다 갔다는 생각에서다. 친구는 코스모스가 싫다 했다. 한 해의 마감을 알려주는 꽃이라서란다.
가을이 왔으니 추억을 주는 넉넉한 가을인가 하는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하늘이 어둡다.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어찌 이렇게도 아름다운 가을 날을 비가 채우고 있단 말인가? 시골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을 비다. 벼가 영글고 밭 곡식이 익어야 한다. 가을 날의 성스런 타작을 해야 한다. 벼가 익고 따가운 햇살 아래 습기가 말라야 가능한 일이다. 황금색이 출렁이던 논바닥엔 익어가던 벼가 누웠다. 가을 비와 함께 찾아온 바람의 심술이다. 찰 지게 영글어야 할 벼가 누워 있으니 일년을 공들인 농부들의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기나긴 가을비가 걱정되어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시골에서 오이 농사를 짓는 친구다. 고향을 찾으면 오이도 주고 고향 소식도 전해주는 오래 전의 친구다. 친구가 한숨을 짓는다. 햇살이 없어 오이가 자라지 않는단다. 자란 오이도 모양이 제각각이란다. 오이가 구부러지면서 생김이 어색하고, 맛도 없단다.
김장 배추가 기다리는 맑은 햇살

▲황금들판을 이루는 벼가 익어가고 있다. 농부들의 피와 땀으로 익어가는 벼가 탐스럽다. 따가운 햇살이 찾아오고, 서늘한 바람에 불어오는 가을이 그리운 계절이다. 긴 가을비가 내리는 들판은 언제 햇살이 내려올까를 고대하고 있다. 추억을 주는 가느다란 가을비가 그리운 계절, 긴 가을비가 누런 들판을 멍들게 하고 있다.
박희종
징한 가을비가 미워졌다. 배추의 주산지로 해발 300m의 고랭지 채소가 적합한 골짜기. 비탈 밭에는 푸른 배추가 가득하다. 여름부터 정성을 쏟은 김장 배추는 농촌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 맑은 햇살을 기다리는 것은 농부들이요, 또한 가을 김장 배추와 무다. 햇살과 함께 살을 찌우고 노란 고갱이가 실한 김장을 기대해서다. 김장을 해야 하고, 김장과 절임배추를 팔아야 한다. 김장과 절임배추 주문을 받는다는 현수막이 헛되이 되지 않아야 한다.
김장 축제를 열어야 하는데 배추밭이 초라해 보인다. 비탈 밭을 가득 메운 배추는 몸서리를 친다.
그렇게도 긴긴 날 내리는 가을비가 못마땅해서다. 정녕 가을은 가고 없는 것인가? 이렇게 또, 겨울이 오고 마는 것이 아닌가?
지난해의 기억이다. 갑자기 찾아온 겨울은 낙엽을 지워버렸다. 서늘한 바람으로 만들어지는 가을 단풍을 검은 낙엽으로 만들고 말았다. 골짜기의 아름다움이 그리웠던 지난해였다. 또, 이대로 겨울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길가엔 노점상들도 문을 닫았다. 늙은 호박이 등장하고, 갖가지 농산물이 등장하는 무인 판매점이다. 일 년 내내 계절 따라 품목이 변한다. 긴 가을비엔 어쩔 도리가 없다. 허연 비닐로 덮어 놓은 농산물이 안쓰럽다. 과일을 파는 노점상도 개점휴업이다. 며칠째 가판대를 덮어 놓은 비닐만 바람에 날리고 있다.
지나는 길가엔 노란 산국이 꽃을 피우려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산비탈에도 그리고 바위 언덕에도 자리를 잡았다. 산국이 언제나 꽃이 필까를 학수고대했다. 노랑이 벌을 모으고 나비를 유혹하는 계절, 지나는 길에 코를 벌름거려야 했다. 산중에서 퍼지는 깊은 달콤함에 발걸음을 잡아서다.
추억의 가을날이 그리운 계절이다.
시골 골짜기의 가을 비

▲비에 지친 김장배추 추억을 주는 가을비인가 했는데, 기나긴 가을비가 내리는 골짜기다. 여름부터 농부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풍성한 김장배추가 긴 가을비로 병이 들었다. 농촌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배추농사, 김장과 절임배추로 삶을 이어가야하는 농촌의 씁쓸한 배추밭 풍경이다.
박희종
종일 가을비가 내리는 골짜기는 조용하다. 오가던 산새도 흔적 없고, 그토록 울어대던 이웃집 닭도 울음을 멈추었다. 책을 읽고 간간히 글을 쓰다 바람을 찾아 나섰다. 고요한 골짜기, 읽을 책이 있고 글을 쓸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세월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삶, 외로움은 삶의 동반자다. 할 일이 있고 혼자도 잘 놀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책과 가까이할 수 있고 가끔은 수채화도 그려본다. 더러 색소폰을 불며 지루함을 재운다. 늙어가면서 얼마나 다행이던가! 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것, 대단한 즐거움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 먼 산으로 눈이 갔다. 뿌연 안개와 함께 일렁이며 산이 움직인다.
온 산을 덮었던 안개가 앞 산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감추었다 보여주고, 숨겨다가 피해 간다. 산이 움직이고 안개가 서성인다. 비가 오면 자주 만나는 골짜기의 풍경이다. 가을엔 필요 없는 기나긴 가을비가 주는 풍경이다. 대관령이 따로 없고 미시령이 오고 간다. 기나긴 가을비가 주는 그림보단 가을의 추억을 주는 가을비였으면 좋겠다. 길게 자리 잡지 않고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가을비, 언제나 이런 비를 만날 수 있을까?
오래전에 추억을 주던 가을은 어디로 갔을까?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낙엽 지는 거리를 걷는 그런 가을을 만나고 싶다. 추억의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그런 가을 말이다. 풍성함을 주고, 뿌듯함을 주는 가을말이다. 추적대는 기나긴 가을비가 거추장스러운 골짜기지만, 멋진 그림이라도 그려주니 그나마 다행인 아침이다. 여기는 가을 비가 길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자그마한 골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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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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