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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10.22 15:12수정 2025.10.22 15:1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9살 아들과 자동차 세계여행을 하다 갑자기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대에 선발된 아빠, 2024년 12월부터 약 1년간 남극기지에서 대기과학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 지난 기사 <양배추 없어도 괜찮은데... 닭갈비 주문 퇴짜 맞은 사연> https://omn.kr/2f57l 에서 이어집니다.
이제 남극 킹조지섬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간다. 온통 하얀 눈과 세찬 바람 속에서 영원히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던 이 땅에도, 조금씩 푸른 하늘과 맨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맞는 마지막 명절이 다가왔다. 출남극까지 50일이 채 남지 않았으니, 이번 연휴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쉼표이기도 하다.

▲마리안소만 빙하 푸른 하늘 아래 빛나는 빙하(20025.10.10)
오영식
지구 반대편에서 맞은 한가위
기지의 냉장고와 식재료 창고에는 이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남은 것은 냉동과 건조된 식품뿐이지만, 명절만큼은 달랐다. 우리는 그동안 아껴둔 귀한 식재료를 꺼내 대원들과 함께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한쪽에서는 제기를 닦고, 다른 쪽에서는 육전과 동태전, 두부전을 부치느라 고소한 기름 냄새가 기지 안을 채웠다.
남극에서 두부는 특별한 음식이다. 마트나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냉동 보관해서 먹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석을 앞두고 콩을 불리고 갈아 직접 두부를 만들었고, 명절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막걸리도 며칠 전부터 미리 담가 두었다.

▲세종기지의 추석 명절 음식을 준비중인 대원들(2025.10.04)
고용수
하지만 지난 1월, 국내외 하계대원들로 북적이던 설날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는 열여덟 명의 월동대원만 남았다. 오랜만에 명절 음식을 나누며 웃음소리가 오갔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딘가 비어 있는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긴 겨울을 견디는 동안 대원들은 크게 웃지도, 그렇다고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매일 같은 일상을 견디며 하루를 보낼 뿐이다.

▲세종기지의 설날 설날 음식을 준비하는 월동대와 하계대원들(2025.01.28)
오영식
'더도 말고 덜도 말라'는 한가위지만, 우리는 모두 가족을 만날 수 없다. 한국에서라면 평소엔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던 친구들도 명절이면 얼굴을 마주하지만, 이곳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우리만의 추석을 보냈다.

▲추석 차례상 대부분 냉동 또는 건조 식품으로 만든 차례 음식(2025.10.05)
오영식
단짝 아빠 없이 맞은 아들의 생일
추석 다음 날은 아들의 열두 번째 생일이었다. 2015년 10월, 첫 번째 월동을 할 때 나는 아들의 첫돌을 남극에서 보내야 했다. 그때도 아들의 돌잡이와 생일상을 작은 화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은 또다시 아빠가 없는 생일을 맞았다. 첫 생일을 곁에서 축하해 주지 못한 마음에 미안함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는데, 열두 번째 생일이라고 그 마음이 조금도 가벼워지진 않았다.
작년 11월, 한국에서 아들과 작별할 때 가장 걱정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에게 곧 다가올지도 모를 사춘기였다. 내가 멀리 떨어진 동안 혹시 그 시기가 찾아오면 어쩌나, 그 생각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아직 아들에게 사춘기의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통화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와 눈빛 속에서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부자는 영상통화를 할 때도 서로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가 직접 안아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말 한마디조차 참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지만, 나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아들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만큼 소중한 아들의 생일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추석 다음 날 오랜만에 기지 근처의 '펭귄 마을'을 찾았다. 세종기지에서 직선거리로 약 2km 떨어진 이곳은 남극특별보호구역 171번(ASPA 171)으로 지정된 펭귄들의 집단 서식지다. 젠투 펭귄과 턱끈 펭귄 약 5천 쌍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온다.

▲10월의 펭귄마을 7개월 만에 다시 찾아온 젠투 펭귄들(2025.10.07)
오영식
돌아온 여름, 펭귄과 고래의 귀환
이 펭귄들은 매년 10월 무렵 남극의 여름이 시작되면 이곳으로 돌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운 뒤, 3월이면 다시 북쪽으로 떠난다. 그래서 긴 겨울 동안에는 이곳에서도 펭귄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오랜만에 찾은 펭귄 마을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온 젠투 펭귄 무리를 마주했다. 둥지가 절반도 채 차지 않았지만, 수백 마리의 펭귄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겨울이 저물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펭귄들은 둥지 주변을 오가며 조약돌을 물어 나르고 있었다. 남극에는 나무나 풀이 없어서 작은 돌멩이로 둥지를 만든다. 수컷이 암컷에게 조약돌을 물어다 바치는 장면은 구애의 한 방식이다. 거센 바람과 얼음 속에서도, 생명은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가며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년 10월은 펭귄의 짝짓기 철이다. 둥지를 선택해 자리를 잡은 암컷 주위로 수컷들이 모여들어 구애 행동을 벌인다. 우리는 둥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그 모습을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을 남겼다. 펭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하계연구원은 보통 12월 초, 다음 차대 월동대와 함께 이곳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관찰하지 못하는 펭귄의 짝짓기와 산란 상태를 기록해 인계하는 일은 우리 월동대원의 몫이다.
그날 나는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간을 펭귄 마을에서 보냈다. 무엇이든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풍경이 달리 보인다. 작은 조약돌을 물고 뒤뚱뒤뚱 걷는 펭귄의 모습이 그저 귀엽기보다, 오래된 흑백 가족사진처럼 아련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둥지 옆에 앉아 펭귄 무리 너머 맥스웰만을 바라보는데, 멀리서 혹등고래의 숨결이 들려왔다. 거리는 멀었지만 수면 위로 분수처럼 물줄기가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어미와 함께 헤엄치는 새끼인지, 여러 갈래의 물기둥이 나란히 움직였다. 혹등고래는 매년 10월 무렵 남극을 찾아와 풍부한 크릴을 먹으며 여름을 나고, 3월이면 북쪽으로 이동한다. 한국의 여름인 6~8월에는 북극으로, 겨울인 12~2월에는 남극으로 옮겨 다니며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 먹이를 구한다. 그렇게 먼 거리를 오가는 고래가 이곳에 돌아왔다는 건, 남극에도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펭귄마을로 돌아오는 펭귄 무리 이날 수 천 마리의 펭귄이 찾아왔다(2025.10.07)
오영식
이제 대원들과 기지로 돌아가려 언덕을 내려오는데,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매년 이맘때면 펭귄들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을 직접 본 적 사람은 드물다. 정확히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날, 대충 보아도 천 마리가 넘는 젠투 펭귄이 바다에서 물을 털며 줄지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개나 고양이처럼 펭귄이 일상적인 존재지만, 그날의 장면은 달랐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모습을 보면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을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펭귄이 돌아온다는 건, 곧 우리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같이 몰아치는 블리자드를 견디고, 끝없는 어둠을 버텨온 우리에게 겨울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다. 차가움이라는 짧은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공허와 외로움이 스며 있다.
그 매정한 계절을 지나 봄이 스며드는 광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환희 그 자체다. 우리는 그 환희 속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40여 일 뒤면 도착할 다음 차대 대원들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지난 1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해 국내로 보낼 시간이다.

▲남극의 블리자드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 풍경(2025.10.06)
오영식
봄은 오고 있다. 하지만 봄을 맞기 전, 남극은 언제나 마지막 블리자드로 우리를 시험한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 여름이 오기 전 킹조지섬엔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블리자드가 일주일째 몰아치고 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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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기과학 연구원,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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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째 가족과 생이별... 이런 걸 먹고 버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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