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건 언행일치" 그들은 결코 스스로 무릎 꿇지 않았다

[서평] <고등학생 운동사>를 읽고

등록 2025.10.20 15:29수정 2025.10.2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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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시절, 교사 중 한 명은 발렌타인데이에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다가 은밀히 초콜릿을 선물했다. 초콜릿을 받은 학생들 무리는 주말이면 어디론가 떠났는데, 학교가 '우등생'들의 생활기록부 이력을 관리하느라 지정해준 기관에 봉사활동 가는 길이었다. 반 학생이 모 대학에 합격할 때 담임교사가 받는 보너스 금액은 상당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소문을 들으며 '성적 가지고 학생을 차별하는 이유'를 알게 되어 차라리 명쾌한 기분까지 들었던 기억도. 학교의 자율학습실에서 가장 많이 도난되는 물건은 돈이나 전자기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필기노트였다. 경쟁이 치열한 사립학교의 흔한 풍경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며 스스로를 좀먹었다.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적응한 척하며 자신에게조차 소외감을 느꼈던 나는 정확히 5년 뒤부터, 청소년 아닌 입장이 되고 나서야 '청소년 시기의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기의 번민은 내가 여태껏 청소년을 만나며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은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10대 후반에 갇혀 있었다."(135쪽)

20대 중반부터 자임해온 '청소년 활동가'로서 역할을 두고 나는 여전히 때때로 의문에 휩싸이곤 한다. 청소년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청소년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청소년들의 동료인가, 아니면 배후인가.

누구나 청소년기를 관통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급속도로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의 부당 대우에 급속도로 무관심해지는 법이다. 과거, 불의한 사회 구조에 고통 받던 자신을 배반하고 청소년을 오해하는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편승하기 마련이다. 내가 바라보는 청소년이라는 집단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다. 또한 청소년이 미성숙한 요지부동의 집단임을, 누구보다 자신들이 확신한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은 이 사회가 유지되는 논리를 가스라이팅 당하는 내부 식민지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이었어요." -비비언 고닉,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성원 옮김, 오월의봄, 2024) 411p

조한진희 기획, <고등학생 운동사>(동녘, 2024)를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아픈 기억과 잊었던 마음들이 떠올랐다. 내가 청소년 시절에 '고등학생 운동'을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신영복은 "지식인은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이며 대학 시절을 "자기가 함께할 계급을 선택하기 위한 공부와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1980년대~1990년 초반을 살아낸 청소년들은 꿈꾸는 삶이 있었고, 그 사회를 만들고자 그들은 '계급을 선택하는 계급'이 되었다. 공부와 사유 끝에 스스로 조직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회적으로 지워진 기억이 되었을지언정, '고등학생 운동'에 뛰어든 이들의 기록은 나에게 가슴 뛰는 후일담으로 각인됐다.

스물 한 살이던 어느 여름날, 장기 투쟁 중이던 기륭전자 분회의 농성장에 방문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갖가지 할 수 있는 투쟁을 해보는 끝에 단식투쟁 중인 김소연 지회장을 보았다. 사실 노동 운동은커녕 노동조합의 개념조차 잘 모를 때였다. '어째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서 곡기를 끊은 걸까' 동행한 선배를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속물적인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다만 김소연 지회장이 풍기던 비장한 분위기에 압도되며 나는 또다시 궁금했다. '무엇이 저이를 그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 답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고등학생 운동사> 중에서 김소연님의 회고록을 통해 비로소 이해했다. 그에게 고등학생 운동의 의미는 그가 쓴 제목처럼 삶을 바꾸고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생을 건 언행일치를 배우다"(47쪽)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 20대 때 알고 지내던 한 선배는 고등학생 운동 출신이었다. 그는 회한 섞인 자조의 말을 종종 던졌다. '그래도 대학은 갈 걸 그랬어. 나 공부 되게 잘했거든' 생업과의 병행으로 수차례 지연된 방송통신대 졸업이 쉽지 않아서 든 후회였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선배의 열패감이 '고등학생 운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정이나 인지도와 연결되는 면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추측컨대 고등학생 운동이 당시의 선배를 그 자리(운동하는 삶)에 있게 한 힘인 듯 보였으나, 어쩐 일인지 경험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도.

그들의 운동 역사에 위로를 받다


 책표지
책표지 동녘

"아무도 역사의 '거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1:정치편>(이상훈 옮김, 1992) 103p

일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선 신도시에서는 양육자들이 학교 학생회 선거판을 주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공약을 만들어주고, 홍 보영상도 학원이나 업체에 의뢰해 만들고, 표 조직도 엄마들의 네트워크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던 중에 들은, 나에게 흡사 도시 괴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자주적 학생회 쟁취,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구호이던 과거의 역사는 온데간데 없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의 운동 이력을 자원으로 활용해 살아가는 기회주의자들의 세계에서, 고등학생 운동에 뛰어든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기꺼이 역사의 거름이자 배경으로 살고자 했던 이름 모를 이들을 소환한다. 책을 통해 서울고등학생연합이라는 청소년 조직이 "노태우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 군부독재 타도, 민주교육 쟁취"(22쪽)를 구호로 내세우며 6일간 명동성당 농성시위를 했다는 역사를 알게 되면서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격렬한 항쟁이 끝난 후 불의한 현실에 급속도로 무관심한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그때 그 시절, 지키고 싶은 것이 많고 피로했던 어른들에게 실망하고 좌절했을 청소년들. 항쟁이 끝나고 모두가 사적인 삶으로 후퇴하던 때,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의미와 진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인권조례가 정착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가 합의하고 만들어낸 '학생인권'의 가치는 어째서 위협받는가. 왜 학생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만 지는가. '고등학생 운동'을 경험한 이들이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영감은 바로 이것이다. 꿈꾸는 삶이 있었다는 것. 어느 순간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나 역시 여전히 가장 바라는 가치이기도 한. 그들은 결코 스스로 무릎 꿇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는 사회와 삶을 위해 하늘 높이 종이비행기를 띄웠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덧붙이는 글 필자는 부천청소년인권공동체 세움의 운영회원으로 부천에서 청소년들과 주기적인 모임, 책토론과 행사 기획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운동사 - 1980~1990년대, 불온하고 정치적인 10대들의 기록

김소연, 전성원, 김대현, 정경화, 김성윤, 이형신, 안수찬, 양민주, 김영희, 권정기, 조한진희(반다), 전누리 (지은이), 조한진희(반다) (기획),
동녘, 2025


#고등학생운동사 #고등학생운동 #청소년운동 #청소년인권 #조한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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