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일리아스>의 해석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던 카카오톡 대화.
석민주(하길) 제공
민주씨의 열정에 안 교수조차도 혀를 내둘렀다. 안 교수는 민주씨를 "전공자인 나조차도 감당못하는 진짜 덕후"라고 설명했다. 민주씨는 "덕후들은 책을 그냥 읽지 않고 캐릭터 분석을 많이 하는데 혼자로는 한계가 있었다"며 "같이 얘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이 나타났다. 나보다 훨씬 깊이 아는 전공자의 시각을 접하니 해석이 풍부해져서 좋았다"고 전했다.
민주씨와의 대화는 안 교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덕후'가 던지는 질문들이 연구자인 그에게는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안 교수는 "아직도 생각나는 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은 왜 썩지 않았는지 그 질문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는 학계에서는 저평가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죽어서도 온전했으면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의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는 "'덕후'들은 섬세하고 독특하며, 나보다도 훨씬 깊이 파고든다"며 "학계에서는 '<일리아스>의 저자가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를 두고 싸우지만 이러한 논쟁만이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고전이 일반 독자와 '덕후'들에 던져질 때는 전혀 다른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원하는 해석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열 달 사이 : 성덕이 된 덕후, 덕질 잔치 연 교수
▲ '일리아스'를 아세요?...50대 교수는 탄핵 집회서 20대 '덕후'를 만났다 ⓒ 유성호
둘의 교류는 점점 더 화제가 됐고, 새로운 기회가 열리기도 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독립서점 '소요서가'에서 안 교수에게 그리스 고전을 가르치는 강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안 교수는 월 1회 소요서가에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플라톤의 <국가> 등을 가르치는 특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월 4일 '소요서가'에서 열린 첫 특강은 두 사람에게 뜻깊은 <일리아스>를 주제로 했다. 이 자리엔 안 교수와 민주씨 외에도 둘의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또다른 고전 문학 '덕후'들로 가득했다. 안 교수는 "셰익스피어 덕후, 오페라 덕후 등 별별 덕후들이 다 있었다"며 "일종의 '덕질 잔치'인 셈인데, 한국에서 드문 새로운 종류의 취미 공동체의 탄생이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근처 술집에서 뒤풀이를 했는데 <일리아스> 속 캐릭터와 장면 분석도 하고 '윤석열 언제 쫓겨나나' 이런 얘기들도 했다"고 했다. 얘기를 듣던 민주씨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는 바람에 지하철 막차 때쯤 돼서 뛰고 그랬다"고 맞장구치며 웃었다.
민주씨의 삶도 180도 뒤바뀌었다. 그는 <일리아스>를 즐겨 읽던 독자에서, <일리아스>에 대한 해석을 전하는 저자가 됐다. 민주씨는 지난 2월 전자책 구독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로부터 연재 제안을 받았다. 이후 "일리아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총 13화 분량의 에세이를 지난 6월까지 연재하며, 본인만의 시각으로 <일리아스>를 풀어냈다.
내년 4월에는 정식 책 출판도 목표로 하고 있다. 출판사 '창비'로부터 "탄핵 광장과 <일리아스>"를 주제로 책을 써달란 요청을 받아 작업 중이다. 민주씨에게 이 기회가 더 뜻깊은 건, 공동 저자로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민주씨는 이 교수의 번역본을 통해 <일리아스>를 처음 접했다. 민주씨는 "유명한 곳들에서 자꾸 출판을 제안하니 얼떨떨하면서도 영광이었다"며 "특히 이 교수님과 함께 책을 쓰며 진정한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열 달 후 : 삶에 녹아든 광장의 가치

▲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당시 <일리아스>의 문장을 변형해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는 깃발을 들었던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유성호
두 사람은 서로의 만남이 이토록 화제가 된 이유를 "탄핵 광장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공감했다. 민주씨는 "고전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평범한 20대 여성 직장인으로서 안 교수는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이지만, 광장이 매개체가 돼줬다"며 "당시 광장에선 세대를 뛰어넘는 교류가 많았다. 만날 일 없는 이들이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소통한 의미 있는 현상이었다. (저와 안 교수의 만남은) 어둡고 힘든 시국을 이겨내는 소소한, 재밌는 일화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 것 같다"라고 전했다.
안 교수 역시 "탄핵 집회 당시 나부꼈던 수많은 깃발들에 적힌 내용들의 성격이 중요하다"며 "당시 고양이 밥주자는 사람들을 포함해 온갖 좋아하는 것들을 적은 깃발이 등장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광장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곧 타자가 좋아하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와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안 교수가 민주씨에게 선물받은 <일리아스> 깃발 굿즈를 그리스에 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안 교수는 지난 2월 말 직접 그리스를 찾아 아리스토텔레스대학의 학생들에게 민주씨가 제작한 <일리아스> 깃발 굿즈를 나눴고 "탄핵 광장이 지닌 가치"를 설명했다.
안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극우화가 진행 중이고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이 이를 극복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로서 탄핵 광장의 <일리아스> 깃발 일화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를 듣던 민주씨 역시 "(깃발 수출 사실이 알려지자) 다들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고 그랬다(김구는 생전 문화의 힘을 강조 - 기자 주)"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이 우연한 만남이 각자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일리아스>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분석했는데 또 다른 적성을 찾은 느낌입니다. 생업에서의 스트레스를 푸는 돌파구이자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이습니다." - 민주씨
"내 인생 재밌는 에피소드의 한 챕터이자, 탄핵 광장 이후 공동체가 무엇일까, 국가와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 안 교수

▲ 안재원 교수는 석민주씨로부터 선물받은 <일리아스> 굿즈를 지난 2월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대학의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안재원 교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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