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등록 2025.10.26 15:03수정 2025.10.26 15:0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에서 있던 일들을 연재하고 있어요[기자말] |
"선생님, 나는 평생 술을 마셨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술, 기분 좋으면 술. 그게 내 인생이었지."
여든을 넘긴 어르신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의사가 이제 그만 마시래요. 간이 안 좋대요. 처음엔 어떻게 사나 싶었죠. 근데 이거 하니까, 술 생각이 덜 나요. 뭐랄까. 다른 방식으로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 말을 잊을 수 없다. 글쓰기가 술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말.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몇 주가 지나면서 그분의 변화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글에는 점점 생기가 돌았고, 사소한 기억도 따뜻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르신은 이런 글을 낭독했다.
기억을 살리고 마음을 푸는 힘
"내가 스무 살 때,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 돈으로 막걸리 한 병을 사 오셨다. 나랑 둘이 나눠 마셨다. 그게 내가 아버지랑 처음으로 마신 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날 수업이 끝난 뒤 이런 말도 남기셨다.
"이 이야기를 평생 누구한테도 안 했어요. 나한텐 되게 중요한 기억이었는데, 말로 꺼내기엔 조금... 애매했거든요."
어르신은 글을 통해 묻어두었던 감정과 마주했고, 그 감정을 술이 아닌 문장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정리되고, 어딘가 후련해지는 경험. 글쓰기는 그렇게 어르신의 새로운 통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 Unsplash Image
rachelcoyne on Unsplash
또 다른 어르신은 수업 중 이렇게 말했다.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 걱정이었는데, 이거 하면서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아요. 어제 뭐 했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기억력도 좋아지는 것 같고."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희미해진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잊힌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실제로 시니어 글쓰기 수업에서는 회상 능력과 집중력이 좋아졌다는 피드백이 자주 들린다. 한 어르신은 글을 쓴 후 이런 표현을 하셨다.
"내 안에서 뭔가 풀리는 느낌이에요. 꽁꽁 묶여 있던 게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아요."
그 '묶임'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식과의 갈등, 어떤 이는 젊은 날의 상처, 어떤 이는 노년의 고독이다. 글쓰기는 그 매듭들을 부드럽게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후회 없는 치유
글을 쓰고 나면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후회가 찾아오고, 충동적인 쇼핑 후에는 카드 값 걱정이 밀려오며, SNS를 몇 시간 쳐다본 후엔 허무함이 따라온다. 하지만 글을 쓰고 난 후엔 이런 말을 듣는다.
"아, 오늘 이만큼 썼구나."
"내 생각이 이렇게 정리됐구나."
"이 순간을 남겼구나."
작은 문장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 모호했던 감정이 언어가 되었을 때의 후련함, 노트를 덮으며 느끼는 성취감. 이 감정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오래 간다.
나는 종종 상상해본다. 술을 자주 드시는 노인 분들이 대신 펜을 들면 어떨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대신 노트를 펼치면? 그건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실제로 글쓰기 수업에서 변화된 수많은 얼굴들을 봐왔다. 턱에서 힘이 빠지고, 어깨가 내려가고, 눈빛이 맑아지는 순간들. 글을 쓰는 동안 만큼은 세상의 속도와 비교에서 잠시 자유로워진다.
글쓰기는 도파민을 서서히, 자연스럽게 분비시키는 활동이다. 중독이 아닌 지속 가능한 만족감을 주기에 치매 예방이나 우울증 완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인다는 연구도 많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자기 안의 힘을 끌어낸다. 약도 운동도 아니지만 몸과 마음을 함께 어루만지는 조용한 치유다. 그 치유는 그 어떤 의사도, 약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수업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다.
글은 부작용 없는 치유이자, 가장 손쉬운 자기 회복의 도구다. 오늘, 누군가는 술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그 작은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길,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술 대신 펜 잡은 어르신,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